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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 보령제약그룹회장 자서전/03/‘ 논에서 볏집 가져와 메트리스 만들어 군생활 얻은게 많아

힘든 군생활 '성실이 신뢰를 낳는다’는 깨달음 얻어

“아무리 봐도 자넨 되겠어! 내가 올 때마다 자네나 자네 약국이 매번 달라지는 걸 봤어. 그런 성실한 모습이 있으면 약국 사업도 안될 리가 없고, 나도 이젠 안 와봐도 되겠어!”
엄소령님은 그렇듯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었고, 나는 지금도 그 분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 분께 늘 감사하는 것은 단지 나를 제대시켜 주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교훈, 바로 ‘성실이 신뢰를 낳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반 때 6.25를 맞으면서 내 인생은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열아홉살이던 나는 남들과 같이 보령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9.28 수복 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그 길로학병(學兵)에 입대하였다. 곧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2주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부산진국민학교에서의 군사훈련은 말이 군사훈련이지, 간단한 각개전투 요령과  겨우 총 쏘는 법을 가르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당시 인민군에 비해 절대 열세이던 전투력을 감안하면 전선으로 가는 길은 어쩌면 죽음터로 향하는 길인지도 몰랐다. 나 또한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훈련시키던 교관 가운데 한 분이 전선으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는 나를 부르더니,“훈련소에 남아 다른 학병들을 가르치는 조교가 되라”는 것이 아닌가.

전선으로 향하는 다른 학병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비록 적과 직접 총을 맞대고 있지는 않았지만 조교생활도 그리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인근 논에서 볏집을 가져와 메트리스를 만들어 자야 했고, 미군들이 입던 크고 낡은 군복을 걸친 채 매일같이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제주도에 제1훈련소가 생기면서 그 곳으로 옮겨 가 조교생활을 게속했지만 힘겨운 군생활은 여전했다.

제주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던 나는 어느 날 교관으로부터 장교로 임관할 것을 권유받았다. 당시는 초급장교가 절실히 필요한 시절이었으므로 일정한 교육수준과 소양만 있으면 모두 장교로 차출되던 때였다.
장교가 되기 위해서는 총 6개월동안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3개월은 기초훈련, 나머지 3개월은 병과에 따른 특과훈련이었다.

나는 전남 광주에서 기초훈련을 마친 후 내가 선택한 병과인 공병 특과훈련을 받기 위해 경남 김해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삼랑진에서 음식을 사먹으려다 비로소 ‘1차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찌나 배가 고픈지 빵을 사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몇푼 안되는 장교 후보생월급으로 꼬깃꼬깃 모아둔 지폐를 본 상인이 다짜고짜 “그 돈은 못쓴다”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공병학교 훈련은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식사라고 나오는 것은 겨우 밥 한 수저가 될까 말까한 정도여서, 불과 30초만에 죽 들이키면 식사시간이 끝이었다.
그런데도 훈련은 엄격하기 그지 없어서, 일주일 가운데 3-4일은 야간 완전무장 비상이 걸리곤 했다.
훈련은 그렇다 치고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훈련소가 있는 김해 근처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고, 가진 돈도 없던 나는 어느 날 주말 용기를 내서 동료후보생과 함께 김해 인근 초등학교의 교감 관사를 찾아갔다.

그 교감선생님과의 인연이라고는, 언젠가 한 후보생의 면회를 온 것이 그 분께 그저 의례적인 인사를 드린 것 뿐이었다.
교감선생님의 관사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초가집이었다. 우리는 집안을 둘러본 후 그냥 발길을 돌릴까도 생각했는데, 이왕 왔으니 인사나 하고 가자는 생각에서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은 정성스레 차린 저녁상으로 우리를 기꺼이 맞아주셨다. 비록 찬이라고는 없는 양푼 가득한 보리밥과 고추장일 뿐이었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 때 그 저녁밥의 달콤함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누는 기쁨’이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도 두고두고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교관의 권유를 수락한 나는 소정의 과정을 거쳐 갑종간부 45기로 장교에 임관했다. 이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치열한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던 6사단의 백암산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1953년 5월 다시 3개월 과정의 육군공병학교를 38기로 졸업함으로써 공병장교가 된 나는 포성이 멈춘 폐허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아 나름대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4년동안 장교생활을 보낸 나는 1957년 봄, 미침내 군복을 벗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제대를 하기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장교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시절이었으므로 사고나 부상을 당한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예편을 시켜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장교로 군복무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있었겠지만, 당시 내 꿈은 장차 영관장교가 되거나 나아가 장군이 되거나 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당장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이 명백히 서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가슴 속에 가득 차 있던 부픈 꿈은 아무래도 군복과 부대 안에 갇혀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나는 갓 스물다섯살의 푸르디푸른 청춘이 아니었던가.

예상대로 부대 내 상관들은 예편하겠다는 내 뜻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유능한 장교가 제대는 무슨 제대냐”며 더 이상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것이었다. 난 평소 가까이 모시던 엄준흠 소령님을 찾아갔다. 엄소령님은 육군 공병감실 관리과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 분이 상신을 하면 제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상관들처럼 반대를 하던 엄소령님도 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졸라대니까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제대를 하면 뭘 할 건데?”
그렇게 묻는 엄소령님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눈빛이 가득했다. 아직 전후 복구도 제대로 안된 사회에 나가서 뭘 해먹고 살 건지 심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사업을 할 겁니다.”
내가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엄소령님은 어디서 무슨 사업을 할 건지, 자본은 있는지 등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그 때 엄소령님은 자신에 찬 내 목소리만으로도 ‘나가서 굶어 죽지는 않을 친구’라는 믿음을 가졌던 듯하다. 엄소령님의 도움을 받아 나는 마침내 육군 제 1201 건설공병단에서 중위로 예편을 했다.
나중에 내가 보령약국을 개업했을 때 엄소령님은 매달 한 번씩 들러서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와 우리 약국의 모습을 살피곤 했다. 1년 쯤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나를 찾아오던 엄소령님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자넨 되겠어! 내가 올 때마다 자네나 자네 약국이 매번 달라지는 걸 봤어. 그런 성실한 모습이 있으면 약국 사업도 안될 리가 없고, 나도 이젠 안 와봐도 되겠어!”
엄소령님은 그렇듯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었고, 나는 지금도 그 분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 분께 늘 감사하는 것은 단지 나를 제대시켜 주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교훈, 바로 ‘성실이 신뢰를 낳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분이기 때문이다.


김승호 회장이 태어난 충남 보령군 웅천면 죽청리의 고향집.


조용한 죽청마을에 몇채의 가옥이 들어있는 모습.


모교인 숭문고등학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승호 회장의 젊은 시절의 모습.


6사단의 공병장교 시절. 서 있는 사람이 김승호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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