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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레저.신간

언론, 정치계의 거목 최병렬선생을 생각하며 ... 메디팜헬스뉴스 창 간때 ‘정론직필’ 축사

84세 일기로 별세,접시론으로 세간의 화제
호불호 극명..법과 원칙에 따라 끝까지 밀어붙이는 소신파



서울 법대 3학년에 한국일보 견습기자로 입사, 조선일보로 옮겨 편집국장겸 이사를 역임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한나라당 대표와 서울시장을 역임한 최병렬씨가 2일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과 평소 가깝게 지냈던 한 사람으로서 빈소를 찾아 문상을 하다 보니 인생이란 참으로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고인과는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1979년 조선일보에 입사, 기자로 근무할 때 고인은 사회부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60주년을 맞아 신동호 편집국장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김용태 부국장이 국장으로 승진, 불과 6개월만에 국회로 진출하는 바람에 최병렬 부국장이 국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국장으로 승진하자 “기자란 어려운 시험을 뚫고 입사했다 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항상 책을 가까이 하지 않고는 날로 급변하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 뒤 편집국장석 뒤편에 큼직한 책장을 설치했다. 시사성 신간 서적을 빼곡히 채운 뒤 기자들이 책을 읽게 함으로써 의무적으로 독후감을 써내게 했다.

 그는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그가 편집국장으로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식사 자리에서 기자들이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다. 그는 남에게 방회장님이라고 하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만한 것은 아니고 배짱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방씨형제들이 돈을 뒤로 빼돌리고 여러분들에게 급료를 올려주지 않을 사람들은  아니다"라며 자신을 믿고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는 리더십도 강하다. 어느날 편집국 모 부서 차장이 다른 부서 부장과 부서의 업무영역을 놓고 전화기를 던지며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 싸움은 좀처럼 끝나지 않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최병렬 국장은 차장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얼마 후 차장은 편집국에 들어오자 마자 싸움당사자인 부장에게 깍듯이 ”O선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깍뜻이 사과하지 않는가. 최병렬씨는 이렇게 부하직원을 단시간에 설득시키는 리더십이 있다.

 그는 한국일보에서 편집기자로 시작해서 조선일보로 옮겨 편집부 차장으로 승진했다. 다시 정치부 차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당시 편집국장에게 ”저는 편집부에서만 근무해온 내근기자로서 정치부 차장으로 취재하기는 어려우니 정치부 기자로 발령을 내주시오“라고 해서 회사에서는 이를 수락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좋아함과 싫어함이 극명한 사람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손해를 많이 보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종종 듣는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도 두루뭉술하게 끌어안으면 자기 사람이 되어 정치인에게는 큰 수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한번 싫어하는 사람과는 절대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완고한 고집 때문에 ‘최틀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조선일보에 근무할 때도 불 같은 성격이었다. 기자가 낙종하거나 기사를 잘못 쓰면 불호령을 내렸다. 독선적이라 할 정도로 혹독했다. 이 같이 그의 불 같은 성격때문에 조선일보 사원들만 읽는 사보에 어느 기자가  최병렬씨를 가리켜 '악바리 부장'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는 경남 산청 출신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진주중학을 졸업했다. 부산고등학교에 합격하고 가정 형편으로 입학시키기 어렵게 되자 중학교 담임선생은 최병렬씨 어머니에게 ”최병렬군은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입니다. 입학등록금은 제가 내 줄테니 꼭 고등학교에 진학시키십시오“라고 해서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병렬씨는 이런 말을 몇 번인가 들려주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낸 사람들 가운데 최병렬씨를 1위로 지목하고 있었다. 전두환씨가 손봐야 할 사람중 최병렬이 1위라는 말이 세간에 떠돌았다. 최병렬씨는 전두환씨가 피신할만한 곳을 전국에서 찾아보았지만 백담사가 제일 적합하다고 했다. 전두환씨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마치고 다시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최병렬씨는 연희동 자택을 찾았다.

그는 전 두환씨에게 ”제가 당시 각하를 백담사로 피신시키지 않고 연희동 자택에 머물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근처에 있는 대학교의 학생들이 떼 지어 몰려와 연일 돌팔매질을 했다면 과연 백담사에서 지내는 것처럼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전두환씨는 ”그건 자네 말이 옳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박근혜씨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7명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해서 '7인회 멤버'로 불리기도 했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에서 요직에 앉혔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절대 탄핵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아쉬워 한다. 

 그는 언론계에서는 조선일보 대표이사를 지낸 안병훈 출판사 기파랑 대표와 서울법대 동기생으로 가깝게 지내온 사이이며, 역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과도 절친하게 지내왔다. 또  한국일보에서 편집기자로 근무하다 조선일보로 옮긴 이 상우 전 한림대 총장과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필자는 평생을 보건분야에서 기자로 일해온 노재영씨와 함께 12년 전 의료계와 제약계의 전문신문 메디팜헬스뉴스를 창간했다. 최병렬씨는 조선일보 대표이사를 역임한 안병훈씨, 그리고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인보길씨와 함께 와서  창간축하를 해주었다. 그는 행사진행에서 먼저 축사제의를 받았으나 오늘의 주인공은 의약계인사들이라며 제약계 대표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뒤에 등장한 그는 “정론직필로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신문이 되어달라”는 축사를 해서 많은 의약계인사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살다 간 언론계와 정치계의 한 거목을 잃었다.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와 같이 지혜롭고 용기있는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 최병렬 선배를 추도하며....

                                            2022년 12월 3일 
                            메디팜헬스뉴스 발행인   김 용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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