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이 한국인 전두측두엽치매 환자의 임상 증상이 서양 환자와 뚜렷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기존 국제 진단 기준만으로는 한국인 환자를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공식적으로 제시되면서, 한국형 진단 기준 마련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질병관리청(청장 임승관) 국립보건연구원(원장 직무대리 김원호)은 ‘뇌질환 연구기반 조성 연구사업(BRIDGE)’을 통해 구축한 한국인 조발성 치매 환자 코호트(LEAF)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두측두엽치매의 한 아형인 우측 측두엽변이 전두측두엽치매(rtvFTD)의 임상 양상이 서양 환자와 유의미하게 다르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연구는 국내 11개 병원에서 모집한 전두측두엽치매 환자 225명의 임상 정보와 뇌영상(MRI) 자료를 분석한 것으로, 한국인 환자에게 서양에서 제시된 진단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전두측두엽치매는 주로 50~65세의 비교적 젊은 연령층에서 발병하는 퇴행성 치매로, 기억력 저하보다 성격 변화, 감정 둔화, 언어 기능 저하 등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우측 측두엽변이 전두측두엽치매는 얼굴 인식과 감정 처리에 중요한 뇌 부위가 주로 손상되지만, 아직 국제적으로 통일된 진단 기준은 마련돼 있지 않다.
연구진은 서양에서 제안된 두 가지 진단 기준인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진단 트리(ADT)’와 미국 UCSF의 ‘sbvFTD 기준’을 한국인 환자에게 적용해 타당성을 검증했다. 그 결과, 얼굴인식장애(프로소파그노시아)는 한국인과 서양인 환자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으나, 기억장애, 우울증, 공감 능력 저하, 강박적 사고 등은 한국인 환자에서 상대적으로 적게 관찰됐다. 반면 사회적으로 부적절하거나 충동적인 언행을 보이는 ‘탈억제’ 증상은 한국인 환자에서 더 자주 나타났다.
뇌영상 분석에서도 얼굴 인식과 관련된 우측 측두엽과 방추회 부위의 위축 패턴이 한국인 환자에서 뚜렷하게 확인돼, 해부학적 특징은 서양 환자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얼굴인식장애를 보이지만 기억력 저하나 우울증이 두드러지지 않는 한국인 환자의 경우, ADT 기준을 적용하면 우측 측두엽변이 전두측두엽치매로 분류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를 주도한 김은주 부산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한국인 환자의 임상 표현 양상과 문화적 행동 특성을 고려하면 기존 국제 기준만으로는 우측 측두엽변이 전두측두엽치매를 조기에 정확히 진단하기 어렵다”며 “한국형 특성을 반영한 새로운 진단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립보건연구원 고영호 뇌질환연구과장은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거나 감정 반응이 둔해지는 변화는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치매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며 “한국인의 임상 양상을 반영한 진단 기준 개발을 위해 연구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승관 질병관리청장은 “이번 연구는 국가 주도로 구축한 코호트가 실제 진단 기준 검증과 치매 아형 분류 연구에 활용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국가 단위 코호트의 장기 추적 연구를 통해 임상 현장에 도움이 되는 과학적 근거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Alzheimer’s & Dementia에 게재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