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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외면한 응급의료 개혁은 실패한다

  • No : 9803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6-02-06 09:49:32

아무리 선의로 출발한 정책이라 하더라도,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 정책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특히 응급의료처럼 생명과 직결된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최근 보건복지부와 소방청이 추진하는 ‘응급환자 이송체계 혁신 시범사업’도 그렇다. 정책의 목표는 ‘응급실 뺑뺑이’ 해소라는 좋은 취지로 보이지만, 현장을 배제한 채 설계된 제도는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광주광역시의사회·전라남도의사회·전북특별자치도의사회는 지난  5일 공동 성명서를 통해 “응급실 뺑뺑이라는 중대한 사회적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진단 없이, 현상만을 억지로 통제하려는 전형적인 전(前) 정부식 정책 추진”이라며 “시범사업안이 강행될 경우, 이미 뇌사 상태에 가까운 응급의료 전달체계에 사실상의 사망 선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응급실 뺑뺑이’는 단순히 이송 절차가 비효율적이어서 발생한 현상이 아니다. 응급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이 줄어들었고, 응급실 문을 열어두고도 환자를 받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화된 결과다. 그런데도 이번 시범사업은 그 원인을 진단하기보다, 광역상황실 중심의 병원 지정과 사실상의 강제 수용이라는 방식으로 현상만을 통제하려 한다. 이는 응급의료가 왜 작동하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회피한 정책이다.

해외의 응급의료체계는 다른 길을 선택해 왔다. 일본은 응급환자 수용 여부에 있어 의료진의 전문적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는 대신, 불가피한 의료 결과에 대해서는 형사 책임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연간 의료 과실 형사 사건이 100건에도 미치지 않는 이유다. 미국 역시 ‘의료 소송의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민사에 국한된 이야기다. 응급 상황에서의 의료 판단에 대해 형사 책임을 묻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며, 170여 년간 항소심까지 간 의료 과실 형사 사건은 손에 꼽힌다. 유럽 주요 국가들도 중대한 고의나 중과실이 아닌 한, 응급의료 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을 자제하는 것이 공통된 기조다.

이들 국가가 응급의료를 방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의료진이 두려움 없이 판단하고 치료할 수 있어야 환자가 산다는 인식이 제도의 출발점이다. 응급의료체계의 핵심은 통제가 아니라 신뢰이며, 행정 명령이 아니라 현장의 전문성이다.

반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불가피한 악결과에도 형사 입건과 기소, 고액의 민사 배상까지 이어지는 사법 환경 속에서 응급의료 현장은 점점 위축되고 있다.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리려 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장기간의 소송과 형사 처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어느 의료인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응급환자를 받으려 하겠는가. ‘응급실 뺑뺑이’는 의료인의 윤리 부재가 아니라, 제도가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다.

그럼에도 이번 시범사업은 의료진과의 실질적인 협의 없이, 수용 여부를 행정적으로 결정하겠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 전가에 가깝다. 응급환자를 받지 못한 원인을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판단으로 환원시키는 순간, 현장은 더욱 방어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정책은 책상 위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특히 응급의료 정책은 회의실이 아니라 응급실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현장을 떠난 제도는 숫자와 보고서 속에서는 성공일지 모르지만, 실제 환자 앞에서는 실패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전이 아니라 방향 수정이다. 응급환자 이송을 강제하기에 앞서, 왜 병원이 환자를 받지 못하는지, 왜 의료진이 두려워하는지를 먼저 직시해야 한다. 의료진, 행정부, 수사·사법기관이 함께 참여해 책임의 경계를 재정립하고, 불가피한 의료 결과에 대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 한, 어떤 이송체계 개편도 공허한 선언에 그칠 뿐이다.

응급의료는 명분이 아니라 신뢰로 작동한다. 지금 정부가 들어야 할 것은 지침서의 문장이 아니라, 응급실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현장의 목소리다. 시범사업도 그런 목소리를 담아 지역의사회 등과  사전 충분한 협의 후 발표해야 정책의 효율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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