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수총장 자서전/69/뉴욕에서의 생활

  • 등록 2012.05.21 11: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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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안과의사로부터 큰 도움 받아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뉴욕 맨해탄의 ‘그랜드 스테이션’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맨해탄의 거리는 듣던 대로 온통 하늘을 치솟을 듯 솟아 있는 빌딩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나는 사람들도 흑인들이 많았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든 채 노란 택시를 타고 뉴욕 업타운에 위치한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 안내데스크에서 안내해준 대로 인턴 숙소에 짐을 풀고 즉시 옷을 갈아입고 나의 근무지인 일반외과로 갔다. 7월 1일이 인턴 근무 시작인데 7월 10일에 도착하였으니 10일이나 늦은 상태였다. 우리 한국사람들 같으면 먼 곳에서 왔으니 좀 쉬고 다음날부터 근무하라는 배려가 있을 법한데 미국 사람에게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뉴욕에서의 인턴시절.


바로 그때 구내 방송이 나오는데 직감적으로 나를 찾는 방송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로 도착했기에 병원 실정도 모를 뿐 아니라 영어 실력도 부족해서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수간호사에게 오늘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어디서 나를 찾는 것인지 교환에게 문의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알아본 결과 Morgue (사체부검실)에서 찾는다고 하는 전갈이었다.

 

 ‘모규’란 변사 사건이 있을 때 사망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사체를 해부하는 곳이다. 그렇게 해서 미국에서의 인턴 생활 첫날은 사체부검실에서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그 다음날에는 수술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당직의사에게 혼나기도 했다. 미국사람들은 지극히 사무적이어서 인정사정을 안봐주고, 우리처럼 정을 주고 정에 끌리는 일이 별로 없는 듯했다.


처음 1~2개월은 미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하루하루가 힘든 생활 속에서 부모님과 사랑하는 아내, 큰딸 용애 생각에 잠을 설치기 일수였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 한다는 강한 마음을 재삼 다짐하곤 했다. 얼마 후 나는 희망하던 안과를 전공하게 되었고, 점차 익숙해지면서 모든 일이 재미있고 흥미로워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생활할 수 있었다.

 

 레지던트 중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프리빌이란 의사는 의대에서 수년간 안과를 전공, 이민차 미국에 온 분으로 나에게는 큰 도움을 주었다. 많은 것을 그분에게서 배웠으며 인간적인 정을 느낀 분이었으나 후에 들은 바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인턴 생활도 처음이었지만 이역 만리 뉴욕에서의 1년은 나에게 크나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뉴욕 번화가 ‘맨해탄’은 가히 미국의 얼굴이며 세계의 ‘메트로폴리탄’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끝이 안보일 정도로 높이 솟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위용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힘을 그대로 뽐내는 듯했다.

 

동시에 ‘이스트’ 강가에 우뚝 솟은 평화의 전당 ‘유엔본부’ 등을 바라보면 미국의 위력이 어떠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수만리 이국에서 보는 달은 한국에서 보던 달과 모양은 같았으나 사회적 환경은 양국간 너무도 큰 차이가 있어서 하나님이 차별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6·25 사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인명을 손상당한 한국과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라는 상반된 사회를 경험하면서 이같이 느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1950년대만 해도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다. 동양사람을 보면 대개가 중국인이 아니냐고 물었고, 대부분 동양인들의 직업은 음식점이나 세탁소를 경영하는 것으로 알던 때였다. 따라서 내가 한국인이고 의사라고 하면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는 본받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미국 시민들의 독립심은 유아 교육에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우리가 어렸을 적 받았던 교육과는 전혀 달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으면 대화 재료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사람들은 절대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남에 대한 말을 않는 것이었다.

 

또한 질서 지키기의 생활화로 두 사람만 모이면 줄서기를 실천했고, 남이 보든 안보든 공중도덕을 준수하는 등 그 때 인상 깊게 느껴진 것 몇 가지들은 아직도 나에게 깊은 감명으로 남아 있다. 잘 모르는 사람끼리도 눈이 마주치면 “하이” 하고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조금이라도 몸이 스치거나 길을 막게 되면 즉시 “익스큐즈 미!”를 연발했다.

 

그리고 어디서든 조금이라도 서성거리면 반드시 다가와 “메이 아이 헬프 유?” 하며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한국에서도 먼저 웃는 얼굴로 인사하자는 등의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늦은 감이 있으나 좋은 일이라 생각된다. 처음으로 타본 거미줄같이 얽혀 있는 지하철, 큰 건물 안에 기차가 지나다니는 등 60여년이 지난 요즘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때는 아주 신기했던 것들이다.


반년 정도 지나 성탄절 무렵이 되자 병원 의사들이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에게 일년 동안 자기 환자를 잘 돌보아주었다는 뜻으로 팁을 주었다. 의사들이 주는 팁은 1달러에서 5달러 정도였는데도 우리는 매우 고맙게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체면 때문에 과도한 팁을 지불하는 것과는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러한 소중한(?) 팁을 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팁을 줄 때는 적정한 선을 긋고 있다.

 

김용발 기자 kimybc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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