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던 해 6ㆍ25전쟁이 일어나 전주구호병원에서 부상병과 피난민들을 치료하다가 대전구호병원으로 옮겨왔고, 휴전협정 후 대전보건소 초대 보건소장으로 근무했다. 보건소에 있을 때 결혼을 했고 첫딸이 태어난 후 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1956년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사랑하는 가족과 몇 년간 헤어지는 고통이 있었지만, 선진 의학과 더 큰 세상을 보고 배울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1959년 3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인천 기독병원에 잠시 근무했으나 1961년 5ㆍ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약 1년간의 민주당 정권의 혼란상을 보다 못한 군부가 새롭게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비역 군의관 소집령이 발포되었다. 나는 6·25전쟁 때 전주와 대전의 구호병원에서 근무했으며, 1954년 마산육군군의학교에 입교하여 2개월간 기초훈련을 마치고 이미 예비역 육군 중위로 예편한 상태였다.
당시 교수나 의무직(국가기관 산하)에 종사하는 의사들은 단기 훈련 후 바로 예비역으로 편입시켜 사회활동을 하도록 배려해주었던 것이다. 마침 마산 근처의 통영이 아내의 고향으로 이모와 친척 몇 분이 살고 있어서 군의학교를 수료한 뒤 중위 계급장을 단 채 그곳에 들렀다가 대전으로 올라왔던 기억이 있다. 예편 후 나는 대전구호병원에서 대전보건소로 옮겨 근무하였으며, 미국유학을 떠날 때까지 2년여를 재직하였다.
연세대학교 동문회에서 단 한 사람에게 주는 2008년연세인상을 받았다.
군사정권은 혁명 한달여 만에 전체 예비역 군의관을 소집하여 현역으로 다시 배치하였다. 말하자면 나는 두번씩이나 군복무를 하게 된 셈이었다. 우리는 모두 구로동의 예비중대로 소집되었고 나는 미국에서 최신 안과 의술을 배우고 왔다고 하여 부산 거제동에 위치한 제3육군병원의 안과센터장으로 임명되었다.
세브란스 3년 선배인 강성민 대령이 병원장이었고 동기생 몇이 중령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군대는 계급사회인데 나는 중위로 안과과장인데 내 밑에 5~6명의 대위 레지던트들이 있었다. 다른 과 장교들은 우리 안과를 아주 이상한 눈으로 지켜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번은 병원장을 찾아가 주위의 시선 때문에 근무가 어려우니 나에게 대위를 달아달라고 떼를 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차츰 우리 과의 속사정을 안 다음에는 주위에서도 별 말들이 없었다. 당시 제3육군병원에는 안과센터라 해도 기계도 많지 않았으며 단지 눈 외상으로 안구 적출 수술을 한 군인들이 제대를 기다리며 50~60명씩 입원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2~3개월이 지난 후 나는 부산 서면(西面) 로타리에 있는 건물 2층에 야간 개업을 시작했다. 그때는 군의관들이 대부분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나의 처는 내가 미국 간 사이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해 있었으므로 안과 옆방에 미장원을 개업하였다. 살림집은 옥상에 방이 하나 있어 그곳에 기거했는데, 화장실이 옥상에 없다 보니 계단을 내려와 1층 주인집 화장실을 사용하고 다시 3층 옥상에 올라가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야말로 요즘 얘기하는 ‘옥탑방’ 생활이었는데 그래도 야간 개업을 한 덕에 생활비는 물론 후에 병원 개업 때 전세금과 의료 기구 등을 사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의사들은 2개월간 군의학교 교육만 마치면 예비역으로 전역했는데 혁명 초기에 전체 예비역 군의관을 다시 소집하여 현역에 배치한 것이다.
나는 부산 제3육군병원 안과과장으로 1년 가까이 복무를 마친 뒤 제대를 했다. 제대할 무렵이 되자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대학교수로 연구와 교육을 할 것인가 아니면 개업을 할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었다.
그때 부산대에 근무하던 박병국 교수가 나에게 그 대학에 같이 있자며 조교수 직위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나는 교수 생활도 끌리는 바가 있어 고민 끝에 서신으로 큰형님께 상의 드렸다. 그러나 큰형님께서 별로 내키지 않아 하셔서 상경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