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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레저.신간

메이지유신 150주년, 그 발상지를 찾아서...

ㅡ메이지 유신 주역의 산실 쇼카 손주쿠(松下村塾)
 부국강병의 성공모델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난 지 올해로 150주년이 된다. 150년 전인 1868년 사쓰마번(가고시마현)과 조슈번(야마구치현)을 비롯한 반막부(反幕府)세력이 마침내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의 이름으로 막부를 해체시키고 같은 해 10월 23일 새 시대의 연호를 메이지로 정한 사건을 두고 이른바 메이지유신이라고 한다.

19세기 중반 도쿠가와막부의 붕괴에서 명치유신에 이르는 일본의 근대화과정은 자력으로 성공한 것이지만, 반면 우리에게는 망국의 한을 안겨준 통한의 역사이기도 하다.  

 필자는 지난 12월 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의 일정으로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메이지유신 발상지 탐방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 여행을 위해 일본 근.현대사를 전공한 이광훈 카이스트 객원교수가 동행, 가는 유적지마다 명치유신과의 관계 및 우리나라에 얽힌 관계 등 해설을 맡아주었다.

 메이지유신은 19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회변혁이다. 이 변혁으로 일본은 실로 엄청나게 변화했다. 19세기 말까지 미국과 서유럽의 몇 나라를 제외하고 산업혁명과 헌정정치를 이룬 나라는 일본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변혁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 일본의 대변혁을 이끈 메이지유신을 알기 위해서는 그 발상지를 찾아 역사적인 발자취와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지난 봄 역시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서’라는 주제의 역사탐방을 한데 이어 두 번째다.

 12월 4일 8시 인천공항에서 후쿠오카로 출발하는 대한항공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첫날 맨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야마구치현에 있는 인구 5만여명의 작은 도시 하기((萩). 조슈번의 본거지였던 하기는 왕정복고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천황국가’사상이 태동한 명치유신의 발상지다.

 이 곳은 메이지유신 주역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있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정신적 스승이다. 요시다 쇼인은 이 조그만 시골학숙에서 신분출신을 가리지 않고 90여명의 청년들을 가르친 결과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스이,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미우라 고로 등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신분이 미천한 천출이다. 요시다 쇼인은 출신을 가리지 않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의욕이 있는 청년에게 포용력 있게 학숙을 개방한 것이다. 쇼카 손주쿠 바로 이웃에 살고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받아들인 요시다 쇼인의 열린 교육덕분에 제자가 될 수 있었고 존왕양이파의 중심이었던 다카스기 신사쿠를 만남으로써 출세의 발판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게 천추의 한을 남긴 인물이지만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토 히로부미는 혁명에 앞장섰던 상급사무라이들이 전사, 암살, 병사하는 바람에 그 빈 공백을 디딤돌로 유신의 주역으로 부상, 내각제 도입 후 초대총리대신, 헌법제정과 제국의회 설립, 일본 최초의 정당인 입헌정우회 창설 등 일본의 근대화는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야마구치는 특히 조선침략의 주역은 물론이고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이끈 사토 에이사쿠 총리, 현재 일본의 우경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 등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현재의 아베신조 총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9명의 총리가 야마구치현에서 배출되었다. 이곳은 11번의 조선통신사 사절단이 거쳐간 한.일교류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 일본(조슈번)과 해양4대강국(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함대가 1864년 최초로 일전을 벌였던 근대사의 격전장이기도 하다. 존왕양이(尊王洋夷)의 기치아래 강대한 해양세력에 겁도 없이 포문을 열었던 조슈번은 4개국 연합함대의 포격에 무력의 열세를 절감하고 개국, 개항으로 돌아서 무서운 속도로 신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함대와 일전을 벌였던 사쓰마번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조슈번과 함께 근대화의 주역으로 발돋움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더욱 쇄국의 고삐를 잡아당겼던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선비와 사무라이의 대응방식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ㅡ한일합병과 한일협정이 결정된 장소 사이코데이(菜香亭)
 이틀째 일정으로 잡혀있는 류리코지(瑠璃光寺)와 친류데이(枕流亭), 사이코데이(菜香亭)를 찾았다. 류리코지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야마구치 일대를 지배했던 오우치(大內)家의 25대 당주였던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를 위하여 26대 당주이자 동생인 오우치 모리하루(大內盛見)가 건립한 절이다. 오우치가는 백제 성왕의 자손을 자처하며 조선과 활발한 무역을 하여 조선왕조실록에도 200회 이상 등장한다.

 경내에는 막부말기 조슈와 사쓰마의 유신주역들과 사카모토 료마가 동맹을 모의했던 친류데이(枕流亭)가 있다. 이곳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와 사쓰마가 막부타도의 비밀동맹을 맺고 연합전선을 펴게 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 멸망의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이 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다다미 152장의 대연회실을 갖춘 일본 최대의 요정 사이코데이(菜香亭)가 있다. 조슈번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면서 각지에서 유신지사들이 모여들어 메이지유신과 조선침략을 모의했으며, 이곳을 다녀간 메이지유신 주역 대부분의 휘호가 걸려있다. 500여명이 회의를 할 수 있는 이 곳은 이 지역출신의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축하연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의 동생이며, 아베 신조 현 수상의 종외조부인 사토수상은 지난 74년 수상으로 재임시 가고시마의 조선도공 14대 심수관에게 자신의 조상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일본에 왔다는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곳은 또 한일합병과 한일협정의 주역들이 모두 사용했던 한일교류사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어서 유신주역들의 정신적 스승인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무덤이 있는 도고안(東行庵)을 찾았다. 도고(東行)는 다카스기의 아호다. 다카스기 신사쿠가 메이지유신 전 해인 1867년 폐병으로 사망하면서 묻힌 곳이다. 신사쿠에게 발탁돼 그의 수족으로 메이지시대를 주름잡았던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직에 오른 후 묘역을 성역화하여 국가적인 성지로 보존되고 있다. 안중근의사에게 암살되기 얼마 전 이토 히로부미는 다카스기 신사쿠에 대한 비문을 이렇게 썼다.
 “움직이면 번개와 같고, 일어서면 비, 바람.
  사람들은 감히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 누구를 다카스기에 견줄 것인가.“

 다카스기 신사쿠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정규군을 대체할 유격대로 기병대를 창설하는가 하면, 불과 4천명의 결사대로 막부의 10만대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그는 막부가 소지한 구식총에 비해 몇십배 화력이 강한 개량된 신식총으로 무장시킨 결과 일당백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신사쿠가 이곳 도고안에 묻힐 때는 시모노세키 사람들 3천명이 이곳까지 25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관솔불을 들고 상여의 뒤를 따라 걸어왔다고 한다. 그는 조슈번 출신이지만 생전 활동무대가 시모노세키였다.

ㅡ백자(白磁)탄생 300주년에 세워진 도조(陶祖) 李參平碑
 여행 3일째 되는 날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이삼평(李參平)의 14대후손이 운영하는 사가켄 아리타의 도자기상점을 찾았다. 14대 이삼평의 도자기상점 근처에는 이삼평을 모시는 도산(陶山)신사가 있다. 일본정부는 1917년 백자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도산신사에 도조(陶祖) 이삼평비를 세웠다. 이삼평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외심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다.

 사가번은 아리타도자기를 주력품목으로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아리타도자기는 165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나가사키를 통해 대량수출을 시작하면서 유럽시장을 개척했다. 1659년 한해에만 5만점이 수출된 기록이 있고, 첫 수출 뒤 70년동안 약 700만개의 도자기가 유럽으로 팔려나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사가번은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약 1만점의 도자기를 출품, 그랑프리까지 수상,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가번은 도자기판매수익으로 식산흥업정책을 확대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이렇게 축적한 재정이 후일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는 엄청난 자산이 된 것이다.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출품작을 모두 팔아치우고 막대한 이익을 남긴 사가번 대표단은 귀국길에 네덜란드에서 1,500톤 급의 군함 닛신마루(日進丸)를 발주했다.

 1869년 3월 사가번에 인도된 닛신마루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함으로 메이지 해군의 순양함으로 차출되어 1874년 대만출병,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일으킨 세이난(西南)전쟁 등에서 신설해군의 주력함으로 활약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일본 공사관의 경비함으로 우리나라에 출병하기도 했다.

 사가번은 도자기산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1849년 일본 최초의 제철소를 완공했다. 이어서 1852년에는 대포를 제조하기 위한 반사로를 가동했다. 이는 정부 막부보다도 7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이렇게 배운 기술로 1865년에는 자체기술로 일본 최초의 증기선을 건조했다.

1866년에는 최신식 암스토롱 포 3문을 일본 최초로 수입, 이를 복제하여 제작에 성공했다. 암스토롱포는 막부파와의 무진전쟁에 투입, 위력을 발휘함으로써 유신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결국 메이지유신의 군자금(軍資金)을 조선도자기공들의 후손이 마련해준 셈이다.



ㅡ 사가번의 거물정치인 오쿠마 시게노부
 메이지유신 발상지 탐방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일본에서 2번의 총리를 역임했으며, 와세다대학 설립자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생가와 기념관이다. 조슈번과 사쓰마번 체제로 정국이 개편되면서 이에 강력한 반기를 든 인물이 자유민권파의 오쿠마 시게노부다.

 사가번의 상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오쿠마 시게노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주자학 중심의 전통적 교육에 반기를 들고 개혁을 주장하다가 퇴교를 당할 정도로 반골기질이 강했다. 그는 일찍부터 네덜란드에서 전래한 신학문(蘭學)을 배웠고, 영어교육까지 받아 메이지유신을 이끈 지도자중에서는 누구보다 개방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같은 호방한 성품 때문에 그의 저택에는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 해 찾아오는 방문객이 총리대신을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도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 굵직한 정치인을 비롯 2만3천여명이나 되었다. 그는 서구제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의 개정업무를 추진하다가 극우파에게 폭탄테러를 당해 오른발을 잃었다. 오쿠마 시게노부 기념관에는 그가 오른발을 잃고 활동했던 의족이 진열되어있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1914년 두 번째 총리를 지내면서 제1차세계대전시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미, 영, 프랑스 등 승전국편에 서게 하여 다이쇼(大正)시대 일본의 호황을 이끌어냈다.

 1922년 85세의 나이로 그가 죽었을 때는 히비야공원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 2만여명이 모여들었고, 운구행렬에는 20만여명의 일본인들이 뒤를 따랐다.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은 이같은 장례식모습을 “국민과의 교류가 깊었던 점에서 메이지 원로 가운데 오쿠마 시게노부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평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도쿄전문학교를 와세다대학으로 바꾸고 1907년 와세다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평생 정적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의 성품에 대해 존경심을 아끼지 않았다. 와세다대학교 개교식전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나는 지금까지 오쿠마 시게노부와 여러 가지 면에서 경쟁을 해왔지만 그가 교육기관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와는 상대가 안될 정도로 훌륭하다”고 평했다.

 필자도 한국언론연구원의 장학금을 받아 33년 전인 1985년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연구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곳 오쿠마 시게노부가 자란 생가에서 그의 기념관과 동상을 보니 33년 전 도쿄 와세다대학 교정에 서있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동상이 떠오른다.

 와세다대학은 가이후 도시키, 다케시타 노보루, 모리 요시히로, 오부치 게이조, 후쿠다 야스오 등 역대 많은 총리를 배출했다.

 와세다 대학은 또한 한국의 많은 각계인사들을 배출했다. 기업인으로는 이병철, 이건희, 박태준, 신격호, 이동찬, 김인득, 조석래씨 등이 있으며, 정치인으로는 김성수, 신익희, 유진산 등 많은 인물들이 있다.

 필자는 ‘역사란 유적과 유물을 남기고, 유적과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는 말을 어느 사학자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이번 메이지 유신의 유적지와 유물을 찾아서 단지 역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려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왜 일본에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일본은 쇄국은 했지만, 막상 서구열강과 겨루어보니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총을 수입해서 이를 몇 십배 화력이 강한 총으로 개량하고, 제철소를 만들어 대포를 만들었으며, 자체기술로 증기기선을 만들어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루었다.

우리에게도 통상교섭을 위해 외국의 군함들이 찾아오는 등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일본과는 달리 서구열강의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쇄국에만 매달린 것이 일본과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김용발(메디팜헬스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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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완치는 어렵지만...적절한 치료 받으면 병의 진행 억제는 물론 운동기능·균형유지능력·우울증도 개선 퇴행성 뇌질환의 하나인 파킨슨병은 노화와 관련된 병으로 완치가 불가능한 질환이다. 때문에 치료는 병의 진행을 늦추거나 증상을 줄이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약물치료도 이러한 관점에서 사용되며, 그 효과도 매우 좋은 편이다. 하지만 약물 부작용에 대한 우려, 지속적인 복용으로 인한 효과 감소 등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약물치료와 병행하면서 통증과 떨림증상 등을 조절해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한방치료가 각광을 받고 있다. 강동경희대학교한방병원 박성욱 교수와 함께 파킨슨병 한방치료의 방법과 효과를 알아보자. 치매와 함께 대표적인 노인질환으로 불리는 ‘파킨슨병’ 파킨슨병은 치매와 더불어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퇴행성 뇌질환이다. 국내 유병률은 10만 명당 약 166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으며, 인구 고령화와 더불어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국민건강보험 통계연보에 따르면, 파킨슨병으로 진료 받은 환자의 수는 2004년 39,265명에서 2017년에는 100,716명으로 10여년 사이에 2.5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떨림·경직·자세불안·통증·우울증까지 유발파킨슨병은 흑질이라고 불리는 부위의 뇌 신경세포가 점차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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