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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ㆍ약사

노재영칼럼/ 약가 인하 논쟁, 이제는 ‘속도’가 아니라 ‘근거’로 결론 내야 할 때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을 둘러싸고 제약업계의 반발이 거세다. 최근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한국바이오의약품협회 등 제약·바이오 관련 단체와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이 참여한 ‘산업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약가 인하 영향 분석과 유통질서 확립, 제약산업 선진화 방안에 대한 민관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업계의 주장 요지는 단순하다. 약가 인하 자체를 무조건 반대한다기보다, 그 파급효과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정책에 대한 우려다.

특히 국산 전문의약품 중심의 급격한 약가 인하가 연구개발 투자 위축과 필수의약품 생산 축소,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우려는 일정 부분 현실적인 문제 제기다. 제약산업은 단순한 제조업이 아니라 국민 건강과 직결된 보건안보 산업이며 동시에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평가받는 분야다. 신약 개발에는 막대한 투자와 긴 시간이 필요하고, 산업 생태계가 한 번 무너지면 회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더구나 최근 국제 정세도 녹록지 않다. 중동 지역 긴장 고조로 유가와 환율이 상승하면서 원료의약품 비용이 늘고 있다. 원료의약품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국내 산업 구조를 고려하면 제약사들의 원가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부의 고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건강보험 재정은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와 고가 신약 도입 확대 등으로 점점 더 큰 부담을 안고 있다. 의료 접근성을 유지하면서 보험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일정 수준의 약가 관리 정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결국 이번 논쟁의 핵심은 ‘약가를 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수준까지, 어떤 방식으로 약가를 조정해야 국민 건강과 산업 경쟁력, 그리고 건강보험 재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제약업계가 제안한 민관 공동연구는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약가 인하 정책이 실제로 산업 구조와 의약품 공급, 연구개발 투자, 건강보험 재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약가 인하가 어느 수준까지 이뤄질 경우 산업계가 감당 가능한지, 필수의약품 공급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 그리고 건강보험 재정 절감 효과는 어느 정도인지 등을 데이터와 근거를 바탕으로 검증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 결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의약품 유통 구조다. 최근 의약품판촉영업자(CSO) 확대와 수수료 문제 등으로 유통 질서에 대한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약가 정책과 함께 유통 구조 개선 논의가 병행된다면 산업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민관 공동연구가 진행될 경우 약가 인하 정책의 시행 시기가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실제로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정책적 요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충분한 분석 없이 추진되는 정책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만약 급격한 약가 인하로 산업 생태계가 위축되거나 필수의약품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 사회적 비용은 훨씬 더 클 수 있다.

정책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충분한 논의 없이 밀어붙인 정책은 산업계의 반발을 낳고 결국 사회적 비용을 키울 수 있다. 반대로 산업계 역시 건강보험 재정 현실을 외면한 채 약가 인하 자체를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로는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립이 아니라 근거 기반의 합리적 타협이다. 정부는 산업계의 공동연구 제안을 열린 자세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정책 일정만을 고려하기보다 제약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국민 건강이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약가 정책은 국민 건강, 산업 경쟁력, 건강보험 재정이라는 세 축이 맞물린 복잡한 문제다. 어느 한쪽만을 고려한 정책은 결국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제는 감정적 논쟁을 넘어 “약가 인하는 필요하다면 어느 수준까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객관적 답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부가 제약업계의 공동연구 제안을 수용하고 산업계 역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 비로소 해법이 보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도출된 합리적인 기준이야말로 국민 건강을 지키면서도 한국 제약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까지 확보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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