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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총장 자서전/50/김안과를 개업하다

서울에서 가장 큰 안과병원 개설

1962년 봄 서울에 올라와 장소를 물색했지만 군사정권 하에선 개업조차 자유로이 할 수 없었다. 당시 인구 비례로 개업 허가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종로구나 중구 등 시내 중심가에는 이미 몇몇 유명한 안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중학 선배인 고(故) 이범순 영등포 충무병원장의 권유도 있고 하여 신흥 인구밀집지역인 영등포에 개업하기로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한강 이남에서 동쪽은 광나루 건너 천호동, 송파 일대에 사람들이 조금 살고 있었고, 영등포구는 말죽거리 서쪽, 즉 오늘날 서초구로부터 강서구 일대까지 전부 관할하고 있었다. 행정 구역도 넓었지만 인구도 약 30만에 달했다.

 

1970년대 김안과 전경.  단일의원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당시 서울 인구 100만 명 중 30만 명이라면 적지 않은 인구로 생각되어 기꺼이 영등포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던 영등포 변두리의 채소밭, 호박밭, 공장지대들이 모두 개발되어 아파트 단지와 상가로 변한 것을 볼 때 그 당시 부동산 투자를 했더라면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리저리 개업 장소를 찾던 중 새로 건립한 건물 한 동이 영등포 로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2층에 25평으로 보증금과 월세가 상당히 비싸 주저했지만 계약하기로 결심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처 외사촌 오빠가 목공 기사여서 내부 장식을 아담하게 꾸며 주었다.


1962년 8월초 ‘김안과’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병원을 개원했다. 지금 기억에 첫날 15명의 환자를 진료했는데 처치 주사와 약까지 조제해 주고 2~3원 받았던 것 같다. 나의 생질인 이익재 군과 이미영이라는 간호조무사 등 3명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병원 업무에 온 힘을 쏟았다. 이 군은 나와 근 30여년 같이 근무하며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본인 또한 근실하고 노력형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고생 끝에 부와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나는 중고 Slit Lamp와 Sr90(동위원소)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당시 한국에는 아직 Slit Lamp가 없고 익상편 재발을 방지하는 동위원소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 기기는 우리 병원의 트레이드마크로 환자들에게 좋은 홍보가 됐다. 동시에 미국에서 배운 최신식의 의료 기술도 환자 진료에 활용하여 나름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유학 때 이미 무슨 사업을 하든 홍보의 힘이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서 개업하면 제일 먼저 그것에 치중하여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나는 시골서 생활이 어려운 이종형님을 상경시켜 영등포 일대 주택가와 안양, 수원 등지까지 ‘김안과’ 간판을 직접 페인트로 찍어 전신주와 주택가 담벼락에 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홍보 방법을 약 2~3년간 계속했더니 서서히 환자가 늘고 수술도 많아지고 했다. 이종형님은 11남매를 둔 분으로 셋방을 얻는 데 집주인이 아이들이 많다고 꺼려, 방을 얻은 후 며칠 간격으로 아이들을 2~3명씩 데리고 셋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요새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다산이지만 모두 잘 성장하여,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집안으로 평이 나 있다.

 

날이 갈수록 병원엔 환자가 늘고 수입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는 개업 때 빌려 쓴 채무도 갚아야 하고 저축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집 식구에게 주는 생활비마저 쪼개 주었다. 병원 직원의 근무 시간, 근무 태도도 세밀하게 분석, 시정할 것은 시정해가면서 거의 24시간 환자 진료에 열중하였다. 그러다보니 개업 2년 만에 처음으로 방 3개와 부엌 1개가 딸린 한옥을 구입했다. 내가 번 돈으로 처음으로 마련한 집이었기 때문에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70년에는 몇 년 동안 저축한 돈으로 병원 건너편에 대지 88평의 부지를 마련했는데 평당 가격이 60만원이었던 것 같다. 그 땅은 요지여서 당시 땅 시세로는 비싼 축에 속하였다. 이듬해에는 그곳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평 400평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서울에서 단일 과로는 가장 큰 규모의 안과병원이었다.

 

 지하 1층은 다방으로, 1층 일부는 처제에게 약국으로 세를 놓고 일부는 안경점으로 사용했다. 2ㆍ3ㆍ4층은 안과병원으로 3~4층은 입원실과 수술실로 사용하였다. 진료실 면적만 100여 평에 이르렀고 대형 에어컨을 설치하여 삼복더위를 모를 정도로 쾌적한 진료 환경을 조성했다.

 

요즘은 에어컨 없는 병원이 없지만 당시에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당시 영등포 일대는 1964년 구로공단이 들어서면서 대규모 공장지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다 눈에 부상을 입고 오는 환자들에게는 더없이 쾌적한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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