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중학교에 입학을 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바로 이듬해인 1942년이었다. 일제시대 중학교는 오늘날 중·고등학교의 통합과정으로 운영되었다. 그때는 군청 소재지에 중학교가 없는 곳이 많아 중학교만 가도 유학으로 생각할 때였다. 그러니 당시 일류로 알려져 있던 대전중·공주중·강경상업·공주사범 등에 붙으면 온 동네가 경사 났다고 떠들썩했다. 금단추 뻔쩍이는 검은 교복과 교모를 쓰고 고향에 가면 이웃 사람들이 몰려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바람에 우쭐해 하던 시절이었다.공주중학교 교사는 시내 상단에 위치하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래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성공원과 시내 중심부를 흐르는 제민천과 어울려 잘 짜여진 도시 형태는 지난날 충남의 도청 소재지였음을 일깨워 주었다. 공주는 거기에다 공주중학교·공주농전·공주여자사
내가 양촌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여덟 살이 되던 1936년이었다. 막내로 집에서 응석이나 부리던 내가 아버님의 손을 잡고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자주 붉히곤 하던 기억이 어제 일인 듯하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행랑채 아주머니가 번갈아 등·하교 길을 같이해 주셨기 때문에 낯설음을 금세 극복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 무렵 형수님이 나를 도련님이라 불러 그 호칭이 귀에 익었으나 행랑채 아주머니까지 도련님이라 부르는 게 이상했다. 한번은 어머니께 “왜 행랑채 아주머니까지 그리 부르냐” 여쭈었더니 “장차 너는 크게 될 사람이라 그런다”며 웃어 넘기셨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공주 이인(利仁) 형님댁으로 옮길 때까지 유모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이
큰 형님인 승수 형님은 나와 18년이라는 연령차가 있어서 부모님과 다름없이 나를 키워주신 분이다. 일제시대 때 공주 이인면의 공의(公醫)로 부임하셨는데 밤에도 몇 번씩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자전거를 타고 10리~20리 길을 마다않고 왕진하셨다.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를 형님댁에 기숙시키며 가르치셨으며, 중학, 대학까지 나의 수업료와 잡비를 모두 도와주셨다.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조카 용문, 용목을 키운 아주머님은 신병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중학 시절 나는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도 주말이면 형님댁에 갔으며 세탁물을 아주머님께 부탁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죄송스럽고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는 이인에서 논산으로 옮겨 개업 중이던 동인의원이 전쟁으로 파손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으셨다
나의 아버님은 독자이셨는데 큰할아버지 댁에 양자로 가시어 가문을 이루셨다. 그래서 아버님의 생부(生父)이신 작은할아버님은 결국 손이 없게 되셨다. 내 위로는 형님 세 분과 누님 네 분이 계시었다. 어려서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로는 둘째형을 작은할아버지 양손으로 보냈는데 어려서 질병으로 사망, 셋째 명수(明洙) 형이 양손으로 대를 이었다. 그러나 셋째형은 6·25 사변 때 희생되고, 현재는 큰형님의 둘째아들인 용태가 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이런 집안 사정 때문에 작은할머님은 당신의 아들을 큰집에 양자로 보낸 것이 항시 못마땅해서 불평을 하셨고 그래서 동서 간에 불화가 있었다고 들었다. 아버님은 부농인데도 사계절 내내 쉴 새 없이 일을 찾아 나섰는데 아마도 내가 그 성격을 닮은 것 같다. 봄, 여름, 가을에는 10여 명의 인부를 데리고 감농(監農)을 하시
내가 태어난 양촌면 남산리는 일명 당골 마을이라고 하는데, 우리 집안이 이곳 양촌에 정착한 것은 10대조[桐谷 坤瑞公] 때 일로 이곳에서만 약 3백 50년을 대물림하며 살아왔다. 논산에서 대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동과 북·서쪽 3면은 병풍을 두른 듯 산자락으로 감싸 있고 남쪽은 들녘을 향해 훤하게 트여 있다. 그곳을 가로질러 황산벌의 젖줄인 인내(仁川)천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이 시냇물은 옛적부터 농용수로 이용되어 왔고, 여름철이 되면 농사꾼들이 목물을 즐기고 동네아이들은 멱을 감던 곳이었다. 그리고 남정네들은 쏘가리·붕어·피라미·미꾸라지 등 잡어를 잡았으며, 아낙네들은 다슬기를 줍거나 얼멩이로 또랑새우를 건지던 청정 지역이었다.봄철 냇둑에는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피어났고 흰나비, 노랑나비 떼가 모여들어 지나는
나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38世로 1928년 7월 9일 아버지 죽헌공(竹軒公) 휘 영철(諱 永喆)과 어머님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4남4녀 중 막내로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陽村面 南山里)에서 태어났다. 광산 김씨는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아드님이신 김흥광(金興光)이 그 시조(始祖)이시다. 나는 광산 김씨 문중의 자손이라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조상들께 감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다섯 분의 상신과 일곱 분의 대제학(大提學), 그리고 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낸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 조선 예학의 종장(宗庄)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사씨남정기』 『구운몽』 등을 쓴 서포 (西浦) 김만중(金萬重) 등 그 이름을 열거하자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세도를 누리기보다는 명신과 석학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라
나의 본 직분은 안과 전문의이다. 김안과를 개원하여 동양 최대의 안과병원으로 키운 만큼 항상 안과학의 발전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50년 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해온 임상 실적도 소중한 연구 자료가 될 수 있으므로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준비 과정을 거쳐 나의 아호(雅號)를 딴 ‘명곡 안연구소’를 부설연구소로 설립하여 2003년 11월에 개소식을 가졌다. 명곡 안연구소는 80평의 규모에 총 4억여 원을 들여 개설했는데 망막 연구부, 각막 연구부, 녹내장 연구부, 안성형 사시 연구부 등 4개 연구부를 두고 있으며 각 분야별로 안과 분야의 기초의학을 연구하고 있다. 의학은 기초의학 분야가 튼튼해야만 발전할 수 있는데 안과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연구소의 목표
내년이면 어느 덧 ‘김안과병원’ 개원 50주년을 맞이한다. 반백 년 세월 동안 3명의 인원으로 시작한 김안과가 3백 명에 이르는 대식구가 되었다. 그동안 김안과병원을 거쳐간 모든 분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오늘을 일구어냈음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김안과병원은 현재 지상 8층, 지하 3층의 본관 외에도 지상 6층, 지하 3층의 세계 최초 망막병원까지 갖추고 있다. 안과수술만을 위한 수술실이 모두 17개이며, 입원 수술실은 약 200평 규모에 모두 12개의 수술실을 갖추고 있다. 수술실은 망막, 소아사시 등 전신마취용 수술실 4개와 백내장 등 국소마취용 수술실 8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는 별도로 5개의 외래수술실이 있어서 병원 규모 면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부하고 있다.의료진은 안과전문의 38명, 마취과, 내과, 영상의학과, 진단검사 의학과 전문의
수많은 환자가 찾아오는 ‘김안과병원’의 발전은 전 직원이 일심동체가 되어 환자 진료를 열심히 해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안과병원의 특징은 365일 쉬는 날이 없다는 점이다. 설날이나 추석날도 꼭 오후 1시까지 진료를 하여 환자 머릿속에 김안과에 가면 언제든 병을 치료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놓았다. 병원의 원훈은 “사랑과 봉사, 정성어린 진료, 화합 속의 전진”이다. 병원은 친절과 사랑이 우선이다. 내 눈이 실명되지 않을까 걱정하거나 갑자기 눈이 아프고, 눈물이 나고 앞이 잘 안 보이는 환자에게, 의사가 치료하면 낫는다고 말해주면 안도의 숨을 쉬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직원이 환자에게 불친절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날로 당장 사표를 받겠다고 다짐해 둔다.김총장이 진료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특히 병원에서 의사를 포함한 모든 직원
1971년 5층 규모의 병원을 신축함으로써 단일 안과로서는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영등포 ‘김안과’의 명성이 더욱 알려지면서 환자 수도 계속 늘어났다. 의사도 4~5명, 직원도 20여 명으로 증원되었다. 이화여대 안과 이명수 교수님은 약 20년 동안 계속 레지던트를 파견해주셨는데 이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때 처음 파견되었던 장정옥 선생님은 오랫동안 김안과병원에 근무했고, 같은 시기에 파견되었던 안점순 선생은 이대 동대문병원 안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환자를 열심히 돌본 결과 2년 뒤엔 입원실과 간호 직원 숙소가 모자라 1층을 더 증축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헐려 작은 5층 건물로 다시 지어졌고 건양학원에 기증하여 대학 수익사업으로 활용중이다. 나는 여유가 생기면 땅을 사 두곤 했는데, 1970년에는 부동산 붐이 일어 근처에 사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