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지정학적 충격이 다시 한번 국내 의료 시스템의 취약한 민낯을 드러냈다. 전쟁 장기화로 촉발된 석유화학 원료 ‘나프타’ 수급 불안은 단순한 산업 문제가 아니라, 일회용 주사기와 주사바늘 등 필수 의료 소모품 가격 급등으로 직결되며 의료 현장을 직접 압박하고 있다. 최근 일부 제조업체들이 원자재 수급 차질을 이유로 관련 제품 가격을 15~20% 인상하면서 그 충격은 고스란히 병·의원으로 전가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행 건강보험 수가 체계에서는 주사기, 주사바늘 등 필수 감염관리 재료가 ‘별도 산정불가’ 항목으로 묶여 있어, 원가가 급등해도 의료기관은 이를 진료비에 반영할 수 없다. 수액세트, 의료용 장갑, 마스크, 거즈 등 다빈도 필수 소모품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외부 충격으로 인한 비용 상승을 의료기관이 떠안는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의료 현장은 또다시 ‘보이지 않는 적자’에 내몰리고 있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우리는 완제의약품 생산 능력을 갖추고도 원료 부족으로 필수 의약품인 해열제 아세트아미노펜조차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상황을 겪었다. 그리고 지금, 중동발 공급망 위기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
답은 분명하다. 여전히 준비되지 않았다. 원료의약품은 물론 기초 자재까지 해외 공급망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서, 외부 변수 하나만으로도 의료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산업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보건 안보의 근간이 취약하다는 경고다.
국내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여전히 20%대에 머물고 있으며, 필수의약품 원료는 중국과 인도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가격 경쟁력에서도 국산 원료는 수입산 대비 최대 3배 가까이 비싸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국내 생산 기반은 위축되고, 위기 때마다 공급망 리스크는 반복된다.
이제는 속도의 문제다. 원료의약품 자급률을 끌어올리는 일은 ‘필요한 과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실행해야 할 과제’다. 기업은 대량생산 체계와 기술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고, 고부가가치 원료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부의 결단이다.
실질적인 약가 우대 정책을 통해 국산 원료 사용을 유도하고,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핵심 품목을 선별해 선택과 집중 지원에 나서야 한다. 특히 정책은 보다 정교해져야 한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의약품과 다빈도 처방 품목을 전수 조사하고, 지정학적 리스크로 공급이 끊기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반드시 지켜야 할’ 핵심 품목을 선별해야 한다. 그 위에 선택과 집중 방식의 지원을 얹는 것이야말로 실효성 있는 전략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도 적극 움직이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원료의약품 자급률 문제가 집중 지적되자 한국제약바이오협회를 통해 국내 제약사의 국산 원료 사용 실태를 전면 조사한 바 있다. 아울러 완제의약품에 적용되던 혁신형 기업 제도를 원료의약품 생산 기업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위한 연구용역도 진행하는 등 정책적 대응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검토’와 ‘구상’으로는 부족하다. 최근 발생한 중동발 쇼크에서 보듯이 원자재의 위기는 이미 현실이 됐다. 원료의약품 도 예외는 아니다.때문에 더 이상 속도 조절을 할 시간이 없다. 실행이 답이다.
원료의약품은 제약 산업의 뿌리이자 국가 보건 안보의 기초 체력이다. 뿌리가 약한 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하지만 중동 사태와 팬데믹이 던진 경고를 또다시 흘려보낸다면, 다음 위기에서는 지금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