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도록 약국 일을 돕다가 빈 그릇들을 머리에 이고 혼자서 집으로 향하는 아내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전 재산이 걸린 보령약국이 하루 빨리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밤늦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보령약국을 개업하자마자 나는 초대 관리약사(정재화 : 鄭在和)를 채용하고 그와 단 둘이서 약국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홍성약국에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고 해도, 약사도 아닌 내가 전 재산을 몽땅 투자해서 약국을 경영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두렵고 긴장되는 일이었다.그런 내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준 것이 바로 아내였다. 우리는 당시 결혼 1년을 갓 넘긴 신혼이었지만 나는 일에 매달려 집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약국에서 숙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내는 불평 한마디 없이 식사를 머리에 이고 날라 주기도 하
약과의 우연이 끊을 수 없는 인연과 필연을 낳았고, 그 필연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특히 보령약국의 문을 연 1957년 가을, 내가 성심성의를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종로 5가 124번지 낡은 건물을 신뢰하자, 우연히 만난 그 건물조차 나를 신뢰해 주었다. 그리고 그 우연은 점차 필연이 되어갔다.사실 보령약국 터를 잡은 것이, 그 곳이 원래 약업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거나 사람과 차들의 통행이 빈번한 곳이라거나 하는 철저한 분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대신 이상할 정도로 그 곳이 내 마음을 끌었고, 그래서 나는 허름한 건물 내외형이나 턱없이 비싸게 부르는 임대료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 곳을 내 개업장소로 고집했다. 따라서 어쩌면 보령약국 터와 나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연은 항상 필연을 수반하
마침내 점포를 얻는 데 성공한 나는 그 곳 종로 5가 124번지에다 곧바로 ‘보령약국’의 간판을 내걸었다. 1957년 10월 1일이었다. 약국이름을 고향인 ‘보령’의 지명을 따서 정한 것은 비록 소년기에 떠난 곳이지만 고향 보령이 내게는 여전히 심신의 고향으로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막상 군복을 벗고 사회로 나오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사업을 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말이 사업이지, 내게는 변변한 경험도 자본도 없는 상태였다.나는 곧바로 종로 5가에 있는 집안형의 홍성약국을 찾아갔다. 학창시절 줄곧 내 뒷바라지를 해준 집안형의 집을 찾는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또 다른 꿈이 싹트고 있었다.약국! 그 곳은 바로 내 유년 시절의 추억과 청소년기의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장소가 아니던
“아무리 봐도 자넨 되겠어! 내가 올 때마다 자네나 자네 약국이 매번 달라지는 걸 봤어. 그런 성실한 모습이 있으면 약국 사업도 안될 리가 없고, 나도 이젠 안 와봐도 되겠어!”엄소령님은 그렇듯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었고, 나는 지금도 그 분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 분께 늘 감사하는 것은 단지 나를 제대시켜 주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교훈, 바로 ‘성실이 신뢰를 낳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분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고등학교 졸업반 때 6.25를 맞으면서 내 인생은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열아홉살이던 나는 남들과 같이 보령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9.28 수복 후에 서울로 돌아왔다.나는 그 길로학병(學兵)에 입대하였다. 곧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2주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부산진국민학교에서의 군사훈련은 말
"간혹 형이 잠시 외출을 해서 나 혼자 약방을 지키는 때면 마치 나 자신이 훌륭한 약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양 짐짓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나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32년 1월 6일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죽청리에서 3남 1년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 죽청마을은 작은 산골이었다.아버님은 전형적인 선비기질을 지닌 분으로 대를 물려 내려온 적지 않은 논밭에 농사를 짓고 있어서, 내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집안 살림이 그리 궁핍한 편은 아니었다.그런데 내가 웅천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져 살림이 어렵게 되었다. 아버님이 전답을 팔아 양조장을 인수했는데, 애당초 선비 기질만 지녔을 뿐 사업에는 경험이 없던 아버님이었기에 곧 실패를 하고 만 것이었다.한번 기운 가세는
“신의와 성실의 가치를 일깨워 준, 그리하여 이후 내 팔십평생동안 그 소중함을 가슴깊이 간직하게 해 준 시절이 바로 보령약국시절이었다. 그 시절 약(藥)과의 맺은 인연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한 인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와 성실이라는 값진 이름들과 맺은 인연일 것이다. 그 옛날 약과의 첫 인연이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면 신의와 성실과 맺은 인연은 두고 두고 내 인생을 값지게 했기 때문이다.“우리들의 모든 경제활동, 즉 비즈니스의 요체는 무엇일까.혹자는 비즈니스의 대상이 되는 상품과 지식, 그리고 노동력의 건실함이라고 말한다.이들의 주장은 결국 파고 사는 상품의 질이 우수해야 하고, 노동력 또한 그만한 가치를 지녀야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명분에 입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비즈니스는 바로 ‘인
의료, 제약 등 보건분야 전반에 걸친 정보를 신속히 입수, 이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기사를 실시간으로 다룸으로써 의약업계지로는 가장 열독률이 높은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는 메디팜헬스뉴스가 의약업계의 오너가 창업에서 현재까지 걸어온 성장과정을 다루는 ‘인터넷자서전’을 연재한다.-김승호회장의 인터넷 자서전을 시작하며...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에 이어 이번에는 제약업계의 신화적인 인물로 불리는 김승호 보령제약그룹회장이 회사를 창업한 이래 용각산, 겔포스 신화에 이어 글로벌신약 고혈압치료제 카나브를 개발, 전 세계 수십개국에 2억달러의 라이선스 아웃 계약을 체결하기까지의 그가 걸어온 인생역정의 구석구석을 20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편집자 주)한 회사나 기관, 또는 단체가 꾸준히 성장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느냐는 오로지 그
옥토버 페스트에 참가한 전통의상을 입은 독일인들이 마차에 타고 관객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하고 있다.옥토버페스트 시작되자 수많은 관객 탄성과 환호성 올려독일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쾨니히 호수는 환상적인 경치글 ‧ 사진 = 김용발(메디팜헬스뉴스 발행인)지난 9월 19일 인천공항을 떠나 8일간의 일정으로 두바이를 거쳐 독일뮌헨일대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내와 딸과 함께 세 식구만의 조용한 가족여행이었다.9월 19일 밤 11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에미레이트항공의 에어버스 380은 다음날 아침 9시30분이 돼서야 두바이에 도착했다. 꼭 10시간이 걸린 셈이다.한국시각은 4시 30분으로 두바이보다 약 5시간 빠르다. 숙박 장소인 아틀란티스호텔로 향했다. 이 호텔은 건설비가 무려 15억달러를 들인 럭셔리호텔이다. 두바이 인공 섬 중의 하나인
광산김씨사를 편찬하자 종중에서는 종훈(宗訓)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속출했다. 국가엔 국시(國是)가, 가정에는 가훈이 있는 법인데 항차 명문 광산김씨에 종훈이 없다는 건 말이 아니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여기서 의견을 도출, 숙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숭조정신 바로 살려 일가화합 이룩한다.(崇祖敦睦) 둘째 충효사상 바로 익혀 정의사회 구현한다.(家傳忠孝) 셋째 우리예법 바로 알아 덕으로써 실천한다.(禮本德行)이렇게 종훈을 만들고 나니 일가간의 화합에 더욱 확실한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며 이 같은 조상들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생활화하고 이를 정의사회 실현에 적용, 덕으로 세상 사람과 친목한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1990년 정기총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후로 대종회, 이사회 각종 행사 때는 꼭
종친회란 훌륭한 조상님의 업적을 후세에게 전하고 조상의 유소(遺所)를 잘 보존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보학을 가르치고 예학을 강론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때문에 보학을 가르침은 물론 우리 문중의 훌륭한 어른이신 사계 김장생 선생과 신독재 김집 선생의 예학을 가르치고 광산김씨로서의 언행이 타인의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해 매년 하계방학 때면 강의를 가졌다.처음에는 성균관에서 또 대종회사무실에서 하다가 1996년도에는 건양대학에서 2박 3일의 보학ㆍ예학 강의를가졌다. 약 400명이 참석, 성황리에 마쳤다.나는 예학의 고장인 논산에 세워진 건양대에 예학연구원(禮學硏究院)을 설립하기로 마음먹고 김동기 교수님께 준비위원장을 위촉하였다. 사계·신독재의 훌륭하신 예학은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사회에 나가 행동하는 데에 크나큰 도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