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손익계산서란 결코 수치상의 결산으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에 얼마만한 땀과 정열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 가치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정도를 걷자. 한 목표를 정해 인생의 승부를 걸었다면 한 눈 팔지 말고 외길을 가는 삶이 진정한 가치다운 것이다. 1987년 8월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소위 선진국형 특허제도라 불리는 물질특허가 시행됨에 따라 국내 약업계를 포함한 정밀화학업계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제도의 실시는 결국 외국 제약업체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제약업 대외개방이 이루어질 경우 선진국의 첨단 과학에 의해 생산된 신물질이 상륙할 것이 분명했고, 지금까지 개량적인 연구에 의해 대부분의 의약품을 생산해왔던 국내 제약기업들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연구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고 이를 제약에 응용해야 했는데, 국내 업계의 경우 그에 따른 막대한 설비나 인력을 확보할 여력이나 기술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던 문제들이 국제 분쟁으로까지 번진 사건이 발생했다. 보령제약이 자체 연구에 의해 개발해낸 치료제에 대해 외국의 제약회사가 특허
지난 세월 동안 보령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공존공영의 정신이 밑거름되었음은 물론이다. 묵묵히 땀 흘려 일해 온 직원들의 노력과 의약계 모든 분들의 격려와 성원이 보령을 만든 힘이었음을 생각하면 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상을 받는 일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영역과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럴 경우 상은 자신의 맡은 바 책임과 의무에 더욱 큰 소명감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나 또한 지난 세월동안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 때마다 약업인이자 경영인으로서, 또 이 나라와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깨가 무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수상(受賞)이나 수훈(受勳)은 항상 그 정도밖에 못하느냐’는 채찍질이자 ‘보다 값진 일을 해내야 한다’는 숙제였다. 우선 가장 기억에 남는 상은 19983년 3월에 받았던 ‘약(藥)의 상’이었다. 약업신문사(藥業新聞社)가 주관하는 이 상은 매년 약업계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인사를 선정하여 수여하는 것으로서, 국내 약업계에서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또 확대하면서 나는 누구에게도 그 규모나 설비를 내놓고 자랑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 공간 안에서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연구원들만은 누구에게라도 내놓고 자랑하고 싶었다. 바로 그들이 우리 보령의 미래이자 참된 ‘청년 보령상(像)을 만들어가는 주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치료의약품생산에 전력을 기울이던 1982년 2월, 보령제약 중앙연구소의 설립은 우리에게는 새로운 꿈의 산실을 마련했다는 큰 의미를 가진다. 기술개발과 연구요원 양성이라는 목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연구소는 미래의 제약업을 이끌기 위한 우리의 원대한 포부가 축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했던 한국경제는 외국 제약회사의 원료부분 100% 투자개방이라는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연건평 1,200평 규모의 보령제약 중앙연구소. 당시로서는 업계에서 최신식 기기를 갖춘 가장 큰 규모의 연구소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국내 제약업계의 대비는 결코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정밀화학공업 분야의 확고한 기반 없이 양적인 팽창만 거듭해온 국내의약품산업은 기초 원료는 물론 합성기술 개발 부문에서도 넘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의약품 제조분
우리도 질적인 진정한 성장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그 방안으로 제시된 설계안이 신제품 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해마다 최소한 5개 품목 이상의 우수한 신제품을 개발하여 대메이커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제품을 보다 다양화시켜 급변하는 시장 경쟁 구도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한국경제는 GNP성장률 마이너스 5.7%라는 심각한 퇴보 속에서 80년대를 맞았다. 70년대의 고도성장에 제동을 건 이 상황은 그동안 양적인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질적 성장에 소홀했다는 자성(自省)을 추구하는 뼈아픈 교훈이기도 했다. 우리도 질적인 진정한 성장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그 방안으로 제시된 설계안이 신제품 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해마다 최소한 5개 품목 이상의 우수한 신제품을 개발하여 대메이커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제품을 보다 다양화시켜 급변하는 시장 경쟁 구도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우리는 우선 병원 영업의 활성화를 통해 치료제 시장을 개척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처방약품에 의존하는 기존의 영업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국내에서 비처방약품인 OTC제품에 주력하다 보면 전체적으로 많은 수의 영업사원을 투입하고 관리해야
나는 급한 대로 용각산을 소중하게 위문품으로 포장하도록 해서 현지로 보내주었다. 열사(熱砂)의 중동에서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마시며 땀 흘리는 우리 근로자들에게 용각산이 작은 격려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미국에 인삼제품을 처녀 수출한 이래 겔포스, 앰피실린, 아목사실리 등의 수출을 꾸준히 실현시켜 온 보령은 외화 획득을 통해 국익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매출액의 신장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인삼제품은 미국에 수출된 후 서독, 동남아시아, 남미 등으로 수출지역을 확장했는데 특히 말레시아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현지 합작투자협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겔포스 또한 자유중국에 수출된 이래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특히 수질오염이 악화되면서 위장질환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 겔포스에 대한 선호도는 더욱 높아졌다. 자유중국 내에서 겔포스의 탁월한 치료 효과가 알려지면서 일본과 싱가포르에서도 수출의뢰가 오고 있었다. 인삼제품과 겔포스의 수출은 1980년 한 해 동안에 약 50만달러 상당의 외화를 획득하였으며 1981년 상반기엔 약 37만달러, 연말에는 100만달러를 돌파했다. 한편 80년대 들어 보령제약에는 난데없이 중동 각국의
나는 남들이 평생 단 한 번도 힘들다는 홀인원을 세 번이나 기록했다. 그 처음은 구심 발매 협의차 일본을 방문했던 1980년 3월 니혼 칸트리 클럽에서였고, 두 번째는 1983년 5월 안양 CC, 세 번째는 1989년 9월 여주 CC에서였다. 비약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기분 좋은 순간마다 세계를 향해 힘찬 샷을 날리는 보령의 꿈을 그려보곤 했다. 70년대 중반 이후 유력한 수출전략상품을 모색해오던 우리가 그 가능성을 발견한 쪽이 바로 인삼제품이었다. 당시 해외에 그 신비한 효능이 널리 알려지고 있던 인삼 제품류는 관련 품목의 수출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인삼의 경우 이미 생약 생산에 필요한 각종 설비를 갖추고 있는 우리로서는 아주 적합한 수출품목이 될 수 있었다. 더욱이 ‘생약의 명문’이라는 기업이미지를 굳힌 터에, 장차 한국의 대표적인 생약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삼제품을 수출하는 것은 기존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보령제약은 1977년 1월, 그동안 인삼제품을 생산해오던 한국인삼제품정제사를 인수 합병하였다. 이어 첫 수출상품으로 결정한 인삼제품은 ‘고려인삼차’였고, 그 첫 대상국은 서독이었다. 1977년 6월,
원남동 사옥으로의 이전을 계기로 나는 동생 김경호에게 보령약국의 경영을 완전히 일임하였다. 보령제약의 모체가 되었던 보령약국의 경영에서 손을 뗀 것은 오직 제약에만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와 각오 때문이었다. ‘청년 보령’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길에 나는 성큼 발을 내딛었다. 그 해 10월 1일의 창립 14주년 기념식은 자연스럽게 사옥 이전을 기념하는 행사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나는 이날 기념식에서 “시련을 이겨낸 그 힘과 정열로 새로운 ‘청년 보령’을 세우고 다져나가자”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청년 보령’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청년’은 비단 젊은 세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이 청년다울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진취적인 영정과 의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아무리 젊고 건장한 세대라 할지라도 영정과 의지, 그리고 꿈이 없다면 그는 이미 무기력에 빠진 노인에 다름 아닐 것이요, 반대로 아무리 늙고 왜소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꿈을 이룰 진정한 열정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이 아닌가. 오직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그 신념과 열정만으로
원남동으로의 사옥 이전은 안양공장의 수해로 인한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던 당시, 회사 전체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사준비를 하면서도 직원들은 지난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의지로 회사 발전에 최선을 다할 각오를 다졌다. 따라서 그 자세야 어떻든 우리에게 원남동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명당이 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종업원들의 노고와 각계의 도움으로 수해를 입은 안양공장은 빠른 시일 내에 복구되어 갔다. 수해를 입은 지 불과 한 달만에 일부 생산라인을 가동시키는 등 공장 가동을 정상화시켜가는 가운데 1977년 9월에는 본사 사옥을 이전했다. 보령약국 근처에 있던 사옥은 그 위치와 구조상 불편한 점이 많았던 데다, 보령약국 근처에 있다보니 일반인들이 약국과 제약을 동일시하는 불합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새 사옥은 원남동(苑南洞) 66-21번지에 위치한 콘크리트 골조 5층 건물이었는데, 원래 동광약품(東光藥品)이 사옥으로 사용했던 것을 우리가 매입한 것이었다. 이로써 보령제약은 1963년 출범 당시부터 사용했던 종로 사옥을 떠나 14년만에 새로운 원남동 시대의 막을 올렸다. 새 사옥이 자리 잡은 원남동은 1946년에 생긴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