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보험제도는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제도이면서도 그 납부액의 적용, 또 급여 및 비급여의 적용 한계 등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아직도 의료보험문제는 많은 부분이 해결이 되지 않은 채로 지지부진하게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의료보험을 통해 사회의 빈곤층이 많은 의료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한다. 1977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생활보호 대상자에 한하여 실시된 전국 의료보험제도는 처음에는 희망하는 병원의 개별적인 계약제로 실시되었다. 당시 의사 단체에서는 대부분 반대하고 나섰지만 나는 처음부터 의료보험제도를 찬성했다. 미국의 Blue Cross, Blue Shield 제도의 장단점을 미국 유학생활 중에 직접 보았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의 의료보험제도는 의무적인 것이 아니어서 병원과 기업 및 공공기관이 상
1962년 봄 서울에 올라와 장소를 물색했지만 군사정권 하에선 개업조차 자유로이 할 수 없었다. 당시 인구 비례로 개업 허가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종로구나 중구 등 시내 중심가에는 이미 몇몇 유명한 안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중학 선배인 고(故) 이범순 영등포 충무병원장의 권유도 있고 하여 신흥 인구밀집지역인 영등포에 개업하기로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한강 이남에서 동쪽은 광나루 건너 천호동, 송파 일대에 사람들이 조금 살고 있었고, 영등포구는 말죽거리 서쪽, 즉 오늘날 서초구로부터 강서구 일대까지 전부 관할하고 있었다. 행정 구역도 넓었지만 인구도 약 30만에 달했다. 1970년대 김안과 전경. 단일의원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당시 서울 인구 100만 명 중 30만 명이라면 적지 않은 인구로 생각되어 기꺼이 영등포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사람이 살
나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던 해 6ㆍ25전쟁이 일어나 전주구호병원에서 부상병과 피난민들을 치료하다가 대전구호병원으로 옮겨왔고, 휴전협정 후 대전보건소 초대 보건소장으로 근무했다. 보건소에 있을 때 결혼을 했고 첫딸이 태어난 후 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1956년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사랑하는 가족과 몇 년간 헤어지는 고통이 있었지만, 선진 의학과 더 큰 세상을 보고 배울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1959년 3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인천 기독병원에 잠시 근무했으나 1961년 5ㆍ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약 1년간의 민주당 정권의 혼란상을 보다 못한 군부가 새롭게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비역 군의관 소집령이 발포되었다. 나는 6·25전쟁 때 전주와 대전의 구호병원에서 근무했으며, 1954
건양대병원은 2010년에 개원 10주년을 맞았다. 병원의 역사가 짧은 만큼 우리 병원에는 최첨단 의료 장비들이 많다. 의료 장비는 워낙 고가이다 보니 한번 구입하면 새 기기 도입이 어려워, 신설 병원일수록 최신 장비가 많은 셈이다. 개원 초기에 MRI(자기공명단층촬영기)를 비롯하여 16 Slice CT(최첨단 컴퓨터단층촬영기), ANGIO(혈관조영촬영기), 감마카메라, 종양 치료에 사용되는 LINAC(선형가속기), 담낭이나 담석이 있을 때 수술하지 않고 고에너지 충격파를 이용하는 ESWL(초음파쇄석기), 인체를 3D 입체 영상으로 보여주는 라피티아 등 대학병원에 걸맞은 각종 최신 장비들을 확보했다. MDCT(다면검색 컴퓨터 단층촬영기), CYCLOTRON(원형입자가속기), FULL PACS (영상획득 및 전송시스템), OCS(의료정보종합시스템) 등 최상의 진료 설비와 서비스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지역 의료 수준을
2002년 우리나라는 월드컵 경기를 통해 온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놀라운 기적을 일구어냈던 해이다. 온 국민의 열망으로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 민족 전체가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치고 감격에 겨워 태극기를 흔들었다. 더구나 전 세계가 우리를 향해 관심을 쏟았던 경사스러운 행사에 우리 건양대병원이 일조하게 되어 지금도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2001년 3월 우리 병원은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선정하는 2002년 FIFA 월드컵 축구대회 공식 지정병원에 대전ㆍ충남에서 유일하게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대전의 유수한 병원 가운데 가장 후발주자이고 개원한 지 불과 1년 밖에 안 된 상황에서 공신력 있는 대외기관으로부터 우수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월드컵 지정병원은 각국 선수단과 FIFA 임직원, 대회 관계자,
개원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료계는 의약분업 파동으로 대대적인 파업에 돌입하였다. 당초 일찍 해결되리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장기간 계속되면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사회적 비난도 쏟아졌다. 비교적 고소득층인 의사들이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환자들을 인질로 삼아서야 되느냐는 비난도 쏟아졌다. 계속 운영되어오던 병원들이야 어떻게 꾸려간다 하더라도 이제 막 개원하여 환자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문을 닫게 되면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의사협회와 병원협회 등의 강경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다가는 앞으로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리 병원도 어쩔 수 없이 파업에 동조한다는 뜻을 밝혔다. 단 파업 참여는 의사들의 자의에 맡긴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조마조마했다. 의사들 역
오늘날은 병원이 단순히 진료만 하는 시대가 아니다. 병원 건물을 크게 짓고 최신식 의료장비를 도입해 놓고 환자를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라 환자들이 병원과 병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자신에게 적합한 병원을 찾아나서는 시대가 되었다. 병원을 지을 때부터 나는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병원, 문턱이 낮은 찾기 쉬운 병원, 환자 중심의 환경을 갖춘 병원, 내 집처럼 편안한 병원을 목표로 삼았다. 이것은 우리 건양학원의 건학 이념이기도 하고, 내가 40년 동안 김안과병원을 운영하면서 늘 강조해 온 말이기도 하다.개원한 지 1년 만에 각종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의사, 간호사 및 많은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교수가 365일 직접 진료하는 병원’을 모토로 내걸고 수준 높고 신뢰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공표한 만큼 교수님들은
병원이 준공된 후 이제부터는 개원 시점을 언제로 하느냐가 문제였다. 2000년은 새로운 21세기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개원을 앞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새로운 세기와 함께 뻗어나갈 수 있는 최적의 시점이었다. 모든 매스컴이 뉴밀레니엄의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호들갑스러울 정도였다. 나도 생각 같아서는 2000년 1월 1일, 새천년 즉, 뉴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우리 병원을 개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병원 건물 준공이라는 큰 골격이 완성되었으니, 거기에 살을 붙이고 세세한 실핏줄까지 이어지도록 하여 하나의 살아 있는 거대한 공동체처럼 내부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해야 했다. 일단 병원 진료개시 시점을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로 잡아놓고, 의료 장비 및 기본 물품들을 설치하고, 유능한 의료진과 직원을 선발하기로 했다. 12
부지 선정에서부터 설계, 시공회사 선정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비를 넘기고 막상 병원 신축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자, 2000학년도 신학기 전에 개원을 서둘러야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병원을 개원해야지만 2001년 제1회 졸업생 배출을 앞두고 교수 초빙에서 학생 실습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터였다. 개원 전 3~6개월의 시험운영기간을 감안해서 1999년 10월말까지는 공사가 어떻게든 완료되어야만 했다. 병원 설계를 1997년 5월에 끝마쳤으니 최대한 공사 기간을 짧게 잡아야 했다. 그래서 건축 허가 기간 동안에 시공회사를 선정하는 등 처음부터 시간에 쫓기며 공사를 추진해야 했다. 건축 공기를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서는 계약 동시에 본 공사가 진행할 수 있도록 공사장 진입로 개설, 지하수 개발, 수목 제거 등 기초적인 작업을 사전에 마쳐
나는 설계에 앞서 해외 병원을 두루 시찰했다.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좋은 병원을 짓고 싶었다. 1996년 1월 도쿄의대, 이바라기현 중앙병원, 지께아기 의대병원, 국립암센타, 성루가병원 등을 방문하여 세밀히 살펴보았고 그들의 외래 접수처 및 배치 상황을 설계에 많이 반영시켰다. 2차로 6월에 오사카 시립대학병원을 돌아봤는데 일본에서 가장 현대적이라는 병원답게 규모와 설비가 매우 컸다. 약 1,800병상으로 우리 대학의 600병상하고는 차이가 많아 별 참고가 되지 않았다.해외 병원 견학 외에 국내 병원 중에서는 우리 대학 규모의 노원 을지병원, 전북대학병원, 충남대학병원, 분당 차병원, 이대 목동병원, 아주대학병원 등을 돌아보고 부분적으로 설계에 반영시켰다. 1996년 11월에는 세계의료장비전시회가 도쿄에서 열려 참가했는데 새로운 MRI, CT기계를 비롯, 멸균기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