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우리 대학의 심장부가 된 명곡정보관과 취업매직센터, 건양문화콘서트홀 등 세 건물의 개관식을 가졌다. 재단에서 150억 원을 출연하여 2년여 동안 공사를 한 대규모 역사였다. 세 동의 건물이 한꺼번에 들어서니 학교의 위용이 달라진 것 같았다. 명곡정보관 앞 광장에서 가졌던 개관식에서 뿌듯한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학교 중앙부에 위치한 명곡정보관은 하얀 화강암 외벽에 지상 7층, 지하 1층 건물로서 학교 내 모든 건물로부터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이다. 1층에 대학 행정부서와 5층에 총장실 및 처장실, 6층에 각종 회의실이 있다. 동시통역시설을 갖춘 국제회의장과 각종 세미나실, 그룹 토의실인 PBL실 등을 다양하게 갖추어 대규모의 국제학술대회나 심포지움을 개최할 수 있으며 학생들의 그룹 스터디도 지원하고 있다. 대학 본부에서 사
논산을 중심으로 대전, 서천에 캠퍼스를 구축,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로 충남권의 최고 명문대학으로 부상하겠다는 청사진이 서천캠퍼스의 포기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대전캠퍼스 건립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재취임 첫해인 2004년 8월에 건양대병원 옆 터에 의과학관 기공식을 갖고 2006년 9월에 준공식을 가졌다. 지하 1층, 지상 10층, 연면적 6천여 평의 규모로 세워진 의과학관에는 20여 개의 첨단강의실과 40여 개의 실습실, 세미나실, 체육관, 동아리방이 들어섰다. 의과학관 옆에는 300여 석 규모의 공연장인 ‘명곡홀’을 개관하여 각종 학내 행사는 물론, 문화행사를 기획하여 입원 환자들과 인근 가수원동, 관저동 주민들의 문화센터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건양대병원과 의과학대학이 한 곳에 있으니 양측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의학과의
4대 총장을 지내면서 깨달은 것은 대학의 발전은 물질적인 투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 시스템이 얼마나 원활하게 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총장 한 사람의 힘만으로 학교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건물을 짓고 값비싼 첨단시설을 갖춘다고 해도 그 속에 있는 인적 구성원들의 화합과 단합 없이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학생은 들어와 공부하고 싶은 대학, 학부모는 자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대학, 기업은 그 졸업생을 채용하고 싶은 대학, 교수는 머물러 가르치고 싶은 대학이 최고의 대학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고자 심혈을 기울여 왔다.5대 총장 취임 후 유일한 대학, 유일한 학과를 목표로 하면서 나는 학생중심대학으로의 변화를 꾀했다. 거기에 덧붙여서 “학생을 가르쳤으면 취업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이른바 ‘무
2004년 2월 25일, 나는 5대 총장으로 연임되어 임무를 시작했다. 지난 3년 간 4대 총장으로 해 놓은 일들은 아직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대학은 병원과 달리 40여 개의 학과가 있고 다양한 구성원이 있는 만큼 역동적이었고, 하루하루가 변화의 연속이었다. 3년 동안 학교에 모든 것을 걸고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완결된 일보다 해야 할 일만 눈덩이처럼 불어 있었다. 또 3년 간 일한 만큼 구체적으로 학교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어떤 일을 해야 할지가 눈에 훤히 보였다. 이대로 손을 놓으면 학교의 발전 속도가 늦춰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들었다. 내가 학교에 직접 관여하면서 우리 대학은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체질 변화도 많이 되었다. 김희수총장이 5대총장취임식에서 학군단의 사열을 받고 있다.취임식에서 나는 4대 임기 때가 ‘명문대로의 도약기’였다면 5대 임
나의 첫 임기 중 대학의 발전상을 되돌아보자면 2002년 정부 지원 대형 프로젝트에 3개나 선정된 것을 들 수 있다. 예산 지원과 직결되기 때문에 학교의 재정적 도움도 크지만, 국가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는 자부심이 더 크게 작용하기에 사업 선정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2002년 4월에 산업자원부가 시행하는 지역기술혁신센터(TIC) 주관기관으로 지정되어 총 70억 원 규모로 충남 남부의 지역산업 육성을 주도하게 되었다. 현장실사를 받고 심의위원회의 평가를 거쳐 전국에서 6개 대학이 뽑혔는데, 우리 대학은 충남지역 원격계측 분야로 지정된 것이다. 당시 산업자원부에서 50억원, 우리 대학에서 10억 원, 충청남도에서 5억원, 논산시에서 5억 원을 지원했으며, 고가의 장비들을 구입하여 지역 기업체들과 공동 활용하고 함께 연구 개발하는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TIC
벌써 이십여 년 전 일인 듯싶다. 고향집 영승재에 들러 당시 건양고 교장이었던 구본정 이사장, 시의원이던 김용희 씨 등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양촌면의 딸기 소득이 연 150억 원 정도로 대부분의 농가가 딸기농사로 부농이 되었다는 것이다. 웬만한 집에서는 자녀 교육을 위해 대전에 아파트 한 채씩은 다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학교 스쿨버스를 타고 연산 방면을 지날 때마다 이제 시간이 더 흘렀으니 양촌의 딸기 수입도 훨씬 좋아졌을 텐데 하고 혼자서 흐믓해 하곤 한다. 내가 처음 중고등학교를 세울 때만해도 가난한 농촌이었는데 양촌은 이제는 도시 못지않게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 논농사, 밭농사밖에 몰랐던 고향은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면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늘 고향에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희수 총장의 이런일 저런일....) 다섯번째 이야기우리 대학은 실무에 능통한 지역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로 주로 실용적인 학문에 치중하여 교육을 해 왔고, 타 사립대학에 비해 높은 재단 전입금으로 학교 시설을 확충하고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그 결과 해마다 높은 취업률을 기록해왔고 매년 입시경쟁률도 7~8대 1에 이르렀다.나는 총장에 취임한 후 이러한 장점들은 그대로 유지해 나가되 학교와 학생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하나씩 실천해 나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먼저 대학의 특성화 방향을 찾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 전부터 영어회화(Conversation), 컴퓨터(Computer), 자격증 취득(Certification)을 목표로 한 ‘3C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2001년 2학기부터 학교의 모든 체제를 IT. 즉 정보기술 교육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했다.당시 IT는 국가의 새로
총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치른 가장 큰 행사가 개교 10주년 기념식이다. 개교기념일이 5월 16일로, 학생들의 축제인 한솔대동제와 함께 치러졌다.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10주년을 표방하여 한솔대동제 기간 동안 지역 주민들이 대학 축제를 체험하고 문화행사나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기념식에서 10주년 근속 교직원들을 표창하고 기념품을 수여했다. 처음 학교의 모양새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때 오셔서 고생이 많으셨던 분들이다. 첫 해 입시에서 예상 외로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여 교수님들이 직접 입학원서를 받기도 했고, 교정의 아스팔트 공사가 완공되지 못해 진창에서 입학식을 치르기도 했던 때였다. 동고동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지난 10년간이었다.개교 10주년을 맞아 내외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희수총장이인사말을 하고 있다.이날 교직원과
총장 부임 후 내가 역점을 둔 일은 학내 모든 구성원과 대화를 갖는 일이었다. 교수들뿐만 아니라 학생들, 환경미화원, 버스기사, 경비원, 그리고 학교 주변의 상가 주인들과 원룸, 하숙집 주인들까지 직접 만나러 다녔다. 학내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학교와 학교 주변 환경이 어떤지 피상적으로 보고받는 것보다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만 했다. 학생들과는 인성교육이나 동아리 발표 행사장에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고 강의실을 다니며 수업 받는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다. 교수님들뿐 아니라 학교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경비원이나 환경미화원, 버스기사 분들과도 오찬을 나누며 애로사항도 들었다. 그리고 부총장, 보직 교수들과 함께 ‘1일 미화원’으로 학내 청소를 함으로써, 환경미화원들의 어려움을 체험하는 시간도 가졌다. 우리가 매일 만나면서도
총장이 되고 나서 맨먼저 했던 일은 학교 구석구석을 살피고 모든 구성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대학 총장이면 근엄하게 총장실에 앉아 학교 업무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나의 이런 행동이 돌출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업무 보고나 받고 지시나 내리자고 내가 대학 총장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럴 바에는 재단 이사장으로 뒷자리에 물러나 있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설립자로서, 총장으로서, 나는 학생 하나하나, 교정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마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새벽부터 학교를 돌아보면서 휴지도 줍고 꽁초도 줍곤 했다. 순시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꽁초나 휴지를 줍는 것은 김안과 시절부터 몸에 배인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총장이 담배꽁초를 줍는데 그대로 앉아 있는 학생은 아직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