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당시 많은 엄마들은 아기가 어떻게 아픈지 모를 때는 으레 기응환을 먹이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 '기응환은 만병통치약'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었다.그런 소문과 함께 기응환은 날로 인기를 더해갔다. 아이키우는 엄마들 가운데 예닐곱은 집에다 상비약으로 기응환을 갖추어 놓을 정도였다.약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기응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사는 걱정 하느라 아이들 건강 챙기는 데는 소홀했던 게 50-60년대의 사회분위기였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경제적으로 다소 형편이 나아지면서 어린이의 건강보호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기응환은 그렇게 어린이의 건강에 대한 국민의식이 차츰 개선되고 있을 때 선을 보인 약품이었다.그런데 기응환이 약국에 등장하면서부터 차츰 이상한 말이 퍼
구심에 이은 기응환의 기술제휴는 국내 제약업계에서 ‘생약제제 생산기업’이라는 보령의 기업 컬러를 더욱 선명하게 했으며, 생약제제에 대한 나의 의지도 더욱 공고히 만들어주었다. 더욱이 연이어 발매된 두 제품은 나오자마자 기대 이상의 판매호조를 보여 업계를 자극했다.용각산 발매의 성공은 대외적으로 보령제약의 위상을 크게 바꿔놓았는데, 그 같은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점이 바로 외국의 제약회사들이 자진해서 기술제휴를 협의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일본 굴지의 생약 메이커인 구심제약((救心製藥)과 소아용 약품 메이커인 통옥제약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먼저 구심제약은 1968년 3월 호리 다이스케(堀泰助)사장이 직접 실무진을 이끌고 와 구체적인 협의를 했다. 한국에 가면 일본 약품이 기피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
용각산의 가장 결정적인 공로는 매출액 증가에 있는 것도, 보령제약의 인지도확산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보령제약은 품질 좋은 약을 만들어 파는 회사’라는 신뢰를 심어준 것이었다. 확신은 의지를 낳고, 그 의지는 언젠가 신뢰를 잉태하는 법이다.용각산을 주문하는 약국들이 늘어나면서 업계는 비로소 보령제약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봐 주었다. 그와 함께 일반 소비자들의 인식도 크게 개선되었음은 물론이었다.요컨대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하필 일본회사하고 기술제휴를 해서 돈이나 벌겠다고 작정한 회사’가 아니라 ‘좋은 약품을 만들어 팔겠다고 작정한 회사’로 이미지 변신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용각산의 인기가 고조되면서 그동안 기가 죽었던 영업사원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소비자들의 불만과 약사들의 외면으로
광고가 계속되고 용각산이 차차 대중 속에 알려지면서 ‘순수 생약’이라는 용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새롭게 한 또 다른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생약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 못했던 당시 소비자들은 용각산이 생약제제이고 특히 가래나 기침, 천식 등에 특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용각산을 마치 생약의 대명사처럼 인식하게 되었다.예기치 못한 소비자들의 반응에 한참 자신만만해 있던 영업사원들은 일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일구어 온 밭에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새 제품을 들고 동분서주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영업에 고전을 면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나 또한 당황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마냥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나는 서둘러 우리가 겪은 시행착오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개선하는 일에
용각산은 내가 제약회사를 창업한지 4년 만에 최초로 생산한 신약이었다. 첫 제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나오는 순간 그동안 일본 측과 펼친 지루한 기술제휴 교섭과정, 그리고 성수동 공장이 준공되기까지 모두가 함께 땀 흘린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성수동 공장에서 최초로 용각산이 생산된 것은 1967년 6월 26일이었다. 일본인 기술자들이 입국하여 기술자문을 한지 20여일 만이었다. 첫 생산량은 5만 갑이었다.용각산을 만든 후 내가 느낀 감회는 실로 남다른 것이었다. 우선 용각산은 내가 제약회사를 창업한지 4년 만에 최초로 생산한 신약이었다.첫 제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나오는 순간 그동안 일본 측과 펼친 지루한 기술제휴 교섭과정, 그리고 성수동 공장이 준공되기까지 모두가 함께 땀 흘린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아울러 용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가고 봄기운이 완연해진 1967년 4월 30일, 마침내 성수동 공장이 준공되었다. 기나긴 겨울을 이겨낸 소중한 결실--보령제약의 성수동 공장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성수동 공장 내에는 컨베이어 시스템을 갖춘 자동화설비가 구축되었고, 우리는 마침재 공장다운 공장을 가지게 되었다. 연지동 집에 곁붙여서 지은 연지동 공장 시절을 마감하고 제약회사로서의 당당한 면모를 갖추게 된 감격스런 순간이었다.만 2년 가까운 인내와 노력 끝에 용각산과의 기술제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자, 이제 생산 설비를 구축하는 일이 발등의 불로 남아 있었다.나는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매일같이 성수동 현장으로 달려가 공장건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공사는 큰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막바지 공사를 진행하던 시기가 한겨울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
용각산과의 만남은 실로 인내가 필요한 길고 긴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그것은 기술제휴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결과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바로 인내가 주는, 그 끈질긴 수고로움이 주는 결실과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966년 6월 22일, 주식회사 용각산의 부사장 스기야마(杉山)와 기획관리실장 이께다(池田)가 드디어 보령제약을 방문했다. 보령으로서는 그들이 실로 반갑고도 귀한 손님이었지만 기술제휴 경험이나 관련 전문지식이 별로 없는 우리로서는 당장 상담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일본인 특유의 성품답게 본격적인 상담에 들어갈수록 세세한 부분까지 까다롭게 나오는 바람에 상담은 쉽게 진척이 되지 않았다.부사장도 부사장이려니와 특히 이께다 기획관리실장은 매
실로 끈질긴 인내와 좌절, 그리고 새로운 도전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인내와 도전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일본 측으로부터 ‘보다 긴밀한 상담을 위해 중역진을 보내겠다’는 통보가 온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설득과 제안에 무덤덤한 반응으로 일관했던 입장이 백팔십도로 바뀐 셈이었다.회사 내부에서조차 용각산과의 기술제휴가 무리한 욕심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가운데 나는 일본 측과의 교섭 방안을 강구하느라 고민을 거듭했다.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당시 용각산 측에서도 한국 내의 거래처를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었다.이제 겨우 공장다운 공장을 짓고 있는 신생 제약회사의 경영자로서는 실로 초조한 마음이 아닐 수 없었다.고심 끝에 우선 내가 생각해낸 방안이 바로 ‘오가와’라는 일본인 무역 중개인이었다.
아무리 여건이 좋지 않다고 해도 생약제제에 대한 집념을 떨칠 수는 없었고, 그 가장 적절한 제품이라고 판단되는 용각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용각산이야말로 생약제제에 대한 내 꿈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고, 그것이 기회라고 생각된 이상 발걸음을 재촉해서 그 기회를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바로 이 무렵, 나는 귀중한 정보를 한 가지 얻게 되었다. 그것은 그 동안 비공식 루트를 통해 이따금 국내로 들어오다가 최근 수출입창구를 통해 소량 반입되고 있다는 어느 일본 약품에 관한 것이었다. 바로 ‘용각산’(龍角散)이라는 이름의 생약제품이었다.용각산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있었다. 용각산은 이미 일제시대에 국내에 들어와 널리 소개된 생약으로 가래와 기침, 특히 해소천식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던 약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양약의 기술을 진보시키는 한편으로 한약재에 대한 분석연구에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일찍부터 생약제제를 시중에 판매하고 있던 생약선진국이었다. 따라서 한방에 일찍 눈을 떴던 중국과 한국보다 훨씬 과학적인 생약연구가 진행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한다면 생약제제 개발에 도전해 볼만하다는 판단이 들었다.성수동 공장을 건설하는 한편으로, 나는 향후 사업계획에 대해 여러 방안을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외국과의 기술제휴를 모색하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였고, 우리 회사의 기업특성에 맞는 약품을 선정하는 일도 또 다른 고민거리였다.특히 보령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갈 첫 약품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가 중요한 일이었다. 첫 작품을 통해 확실하게 기업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장차 면면히 이어질 보령 역사의 주춧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