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과대학 인가와 함께 오래 전부터 구상해 오던 대학병원 건립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안과를 전문으로 하는 단일 병원을 30여 년간 운영해오면서 동양 최대의 안과병원이라는 명성까지 얻었던 나로서는 이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종합병원 건립의 꿈을 안고 병원 부지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대학이 위치해 있고 나의 고향이기도 한 논산에 병원을 건립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발전을 위하여 보람 있는 일을 하겠다는 신념에서 육영사업을 시작한 만큼, 여기에 연관된 의료사업도 당연히 고향을 위해 바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동안 의료 혜택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고향 사람들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터였다.나는 건축학과에 재직중이셨던 안병익 교수를 비롯하여 경영학과 교수 몇
인생의 대부분을 오로지 의사로서 살아온 내가 뒤늦게 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의과대학까지 세운다는 것은 내 육영사업에 있어서 대단원을 이룬 것과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병원을 운영하면서 의료와는 궤도를 달리하는 육영에 몰두해왔던 내가 비로소 평생 쌓아온 의료 지식과 병원 운영의 경험을 교육에 접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1994년 9월 교육부로부터 숙원사업이었던 의학과와 간호학과의 인가를 받았다. 그 해 초에 의과대학 설립 신청을 해서 9월에 50명의 정원으로 인가를 받은 것인데 나로서는 평생 소원하던 바를 이룬 셈이다. 의과대학은 대부분의 대학들이 십수 년씩 걸려 설립 허가를 받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 대학은 단 한번에 그 절차를 마친 것이다. 당시 내가 청와대와 어떤 연결선이 있어서 쉽게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닌가
우리 대학은 교육 중심의 대학이어서 연구 중심 대학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 특성을 살리기 위해 매년 교수평가시에 봉사활동에 더 많은 점수를 주어 학교에 대한 기여도, 학생지도, 입시 및 취업에 이르기까지 계량화하여 객관화시키고 있다. 학생 모집은 물론 취업에 있어서도 해당 학과 교수가 책임지는 방법은 요즘같은 지방대학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현실적인 방법이 되고 있다. 물론 학교에서 상응한 지원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 다음은 교수 개개인이 보다 열의를 갖고 임할 때 그 결과는 확실히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느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입시나 취업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학과들은 매년 교수님들의 연봉에도 반영하고 특별 지원금도 주고 있다. 대학의 구성요소 가운데 교수 부문은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교수님들이 어떠한
나는 학교 건물의 본격적인 설계에 들어가기 전에 35개의 대학을 방문한 일이 있다. 건축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느 대학 설계가 잘 되었는지 교사와 강의실, 연구실, 실험실 등의 배치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새로 지은 대학들은 하나 같이 깨끗해 보였다. 특히 용인의 외국어대학은 학생들의 데모로 플래카드 투성이었지만 강의실과 화장실 청소는 깨끗하게 되어 있었다. 아마도 사무처장이나 총무과 직원이 정리 정돈과 청소에 철저한 분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대학은 교실과 복도 청소를 한 달쯤은 안한 것 같았고, 특히 화장실은 냄새에 담배 꽁초 등으로 불결했다. 나는 오랫동안 병원 운영을 해오면서 ‘김안과는 깨끗하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래서 건양대도 깨끗한 학교라는 평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실내 금연ㆍ꽁초 안 버리기 등 대대적인 홍보와 계도를 실
새로운 학과의 필요성에 따라 학생 수가 계속 늘어갔다. 개교 이듬해인 1992년도 4월 1일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도약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창갑 학장님이 그대로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학생 수도 경제학과, 행정학과(야간), 생활체육학과, 건축공학과, 정보통신공학과 등 5개 학과 190명이 증원되어 93년도에는 모두 19개 학과 750명의 신입생을 뽑았다. 특히 1994년은 의과대학 신설 인가를 받았고 대학원 설치인가를 받는 등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의과대학은 의학과 50명, 간호학과 40명의 정원으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중어중문학과, 일어일문학과, 미술학과, 세무학과 등 4개 학과 160명의 증원과 기존 5개 학과의 정원이 100명 더 늘어나게 되었다. 1995학년도 신입생 모집에서는 5개 단과대학, 3개 학부, 19개 학과에서 모두 1,100명을 뽑게 되었다. 총 학생 정
우리 대학은 학생 소요가 심하지 않았으나 몇몇 문제 학생이 말썽을 일으켰다. 한번은 학생회에서 학교 예산을 공개하고 사용처를 밝힐 것을 요구하는 데모가 있었다. 이때 나는 학생들이 이사장의 뜻을 너무 몰라주는 것이 속상해서 재단에서 낸 것만큼 수업료를 인상해서 학생들이 더 부담한다면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잠잠해지고 말았다. 그 무렵은 건양회관과 제2기숙사인 구연학사를 지을 때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보다 재단에서 이입되는 돈이 월등히 많을 때였다. 우리 대학에서도 처음으로 학생소요가 일어나자 나는 그 문제에 대하여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학생운동의 효시는 3ㆍ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동경 유학생들의 2ㆍ8 궐기에서 찾는다. 그 다음은 광주학생사건과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4ㆍ19혁명 등에 의미
교육부로부터 정식으로 10개 학과에 400명 모집 정원의 건양대학 설립인가가 떨어진 것은 1990년 11월 28일이었다. 이미 준비팀이 가동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개교 준비를 서둘렀다. 개설학과는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경영학과, 경제학과, 수학과, 화학과, 전자계산학과, 기계공학과, 컴퓨터공학과, 식품공학과 등 10개 학과로 인문사회, 이공학 분야 등 기본이 될 만한 학과들을 골고루 개설했다. 학생모집을 위하여 먼저 건양대학의 개교를 알리고 본격적인 홍보에 들어갔다. 대전ㆍ충남 일대의 고등학교들은 물론 김안과가 위치한 서울 서남부, 경인지역 등에 집중하여 건양대학의 탄생을 알렸다. 취업이 잘되는 실용적인 학풍을 강조했다. 또 남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둥글둥글한 성격의 인재를 키우는 인성을 중시하는 대학임을 알리고 재단이 튼튼한 양심적인 대학이
이러한 건학이념을 확립하고 대학을 세우기 위한 부지 물색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 무렵부터 나는 매주 주말이면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논산을 오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꼭 주말이 아니더라도 필요하면 당일에 다녀오는 적도 많았다. 주위에서는 승용차를 타고 다닐 것을 권유했지만 시간도 정확하고 차 안에서 일도 볼 수 있는 기차가 훨씬 효율적이고 편안했다. 지금도 서울에 갈 일이 있을 때는 기차를 타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부지를 물색하면서 몇 만평의 넓은 땅을 한꺼번에 구입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게 넓은 땅도 흔치 않았거니와 적당한 땅이라 해도 소유자가 많아 의견을 모으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반야산을 사이에 두고 시가지 외곽에 다소 높게 위치한 현 위치가 마음에 들었는데 땅의 대부분이 담양 전씨 문중 땅으로 되어 있었다. 문중의
그러나 막상 대학 설립을 결정하고 나니 어떤 대학을 세워야 할 것인지 막막했다. 기본적인 의문들이 들기 시작했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세운다면 ‘어떤 유형의 대학이어야 할 것인가?’ 등을 생각하다 밤잠을 설치는 날이 허다했다. 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접촉하며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여러 사학의 설립자와 교수, 정부 관리, 건축가 및 친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 바람에 많은 지식은 얻었으나 막상 어떤 대학을 세울 것인가는 결정하기 어려웠다.특히 대학의 이념, 건학 정신을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설립자인 내 몫이었다. 나는 타 대학과의 차별화 정책에 고심했다. 우후죽순처럼 대학이 생기는 판인데 ‘닮은꼴’이라면 큰 의미가 없었다. 개성 있는 대학, 졸업하면 기업이나 지역 사회에 즉시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는 대학, 그런 대학교육을
/김희수총장 자서전/32/고향 논산을 선택하다건양대학교의 설립은 5공화국 말인 1986년도 당시 청와대 교문수석비서관이던 논산 출신 신극범(愼克範) 박사께서 고향에 전문대학을 세워 보라고 권유해서 시작되었다. 신 박사님은 이왕 중·고교를 세웠으니 대학을 운영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씀이셨다. 큰형님께 상의 드렸더니 가문을 위해 명예스러운 일이니 해보라는 말씀이 계셔서 서둘러 입지를 물색하는 한편 서류를 구비해 교육부에 신청을 했다. 당시 고향 선배이며 중학 선배인 서명원(徐明源) 장관께서도 적극 밀어주셨는데 대통령 결재 과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모처럼 희망을 갖고 추진했던 일인데 안 되자 실망이 컸다. 그러나 이듬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공주사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 논산에 4년제 대학을 허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