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여 년 전은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이 열악했고 더구나 면 단위의 시골마을은 모든 환경이 낙후되어 있었다. 마을에서 유일했던 인수중학교가 폐교되면 학생들은 먼 곳까지 차를 타고 나가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차도 귀하고 차비도 귀한 때여서 그것 또한 부담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지어주자 스승의 날에 많은 학생들이 나에게 감사의 서신을 보내왔는데, 이렇게 훌륭한 학교를 세워주어 공부할 수 있게 됐다는 내용들이었다. 역시 고향에 학교를 설립한 것에 대해 보람을 갖게 되고 학생들의 감사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편지에는 간혹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시설물을 해달라는 요구도 있는데, 나는 대부분 다 수용하여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건양고등학교 명곡학사 준공식에서 김희수 총장(왼쪽에서 여
나는 늘 병원 일에 매진해 왔고, 그것을 천직으로 여겼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막연하게 동경하던 육영에 뛰어들게 되어 일대 변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 학교법인의 명칭을 건양학원(建陽學園)으로 변경하고 그해 9월 양촌중학교를 개교했다. 교육부 결재일인 5월 16일은 재단 소속 각급 학교의 개교일로 삼았다. 건양학원의 명칭은 나의 공주중학 은사이신 민태식(閔泰植) 선생님께서 지어주셨다. 선생님은 8ㆍ15 광복 후 잠시 개성 국립박물관장을 지내신 동양철학의 대가로 서울대에도 근무하신 분이다. 또 충남대 총장직을 역임하신 바 있으며 인격과 학식, 덕망이 높아 학생들이 모두 존경했다. 내가 고향의 중학교를 인수했다는 말씀과 함께 학원 명을 부탁드렸더니 며칠 후 연락을 주셔 반포동 아파트로 찾아뵈었다. 선생님께서 ‘건양’이 육영기관 이름으로
예순의 나이에 나는 대학 설립이라는 큰 일을 벌였다. 그에 앞서 고향 양촌에 건양중고교를 세웠고 10년여 만에 건양대를 개교하여 논산에 고등 교육기관이 들어서는 데 일조했다. 나의 육영사업의 발로는 애향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만일 일찍부터 육영사업에 매달렸더라면 교육적 입지가 좋은 곳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고향의 중학교가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78년 늦가을 뜻밖에 양촌에서 면장님을 비롯 유지 몇 분이 김안과병원을 찾아오셨다. 용건은 면 소재의 중학교 운영이 아주 어렵다며 인수할 의사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육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있었지만 뜻밖의 요청이라 일단 보류하고 여비를 드리며 내려가시도록 했다. 한 달쯤 뒤에 그분들이 다시 상경하셔서 “김 박사
2011년 5월 16일은 건양대학교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성년이 되는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 중이지만 나는 좀 간략하게 치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렵사리 건양대 설립 인가를 받고 길도 제대로 닦지 못한 채 첫 입학식을 가졌을 때를 생각하면 그때 고생했던 분들을 모두 초대해서 크게 자랑하고 싶고 한바탕 잔치도 벌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대학 입학자원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고 대학들은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아직은 잔치를 벌일 때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심정이었다. 앞으로 10년 뒤 우리 대학이 교육중심대학으로 우뚝 서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글로벌 대학으로 위상을 세울 때 그때 크게 자축 행사를 벌여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대신 논산 반야캠퍼스에 ‘스포츠콤플렉스’와 학교
ACE대학으로서 우리 대학은 올해 ‘동기유발학기제’라는 새로운 실험과 도전에 나섰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전공 공부는 다소 늦게 시작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전공이 어떤 것이며 전공을 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 학습 동기를 명확하게 심어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막연하게 목적의식도 없이 대학에 들어왔다가 점점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는 전공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학생들을 보면서 보다 확고한 목표의식을 갖고 시작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곤 했다. 그래서 신입생들이 겪을 일종의 시행착오를 줄여보고자 동기유발학기를 시행하게 된 것이다.그래서 2011년 1학기는 우리 대학 동기유발학기의 원년이 되었다. 신입생들이 바로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한 달간 학습의욕 고취 및 취업 설계 특별교육을 받게 했다. 아직 대학생활에 적응하
1월 28일 제7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나는 제2의 창학을 선포했다. 이제 성인이 된 열정적이고 패기에 찬 젊은이의 모습이 바로 건양의 현재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도약과 전진, 혁신으로 50년, 100년의 역사를 새로이 써 내려가야 할 때가 바로 이 시점인 것이다.그래서 네 가지 비전을 취임사에서 제시했다. 첫째는 정직한 건양, 둘째는 실용 교육과 취업을 책임지는 건양, 셋째는 지역과 함께 하는 건양, 넷째는 글로벌 건양이다. 네 가지 비전은 투명한 학교 운영을 하고, 경쟁력을 갖추어 취업률 상위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지역의 평생교육에 이바지하고 지역과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특성화와 유일화를 통해 아시아의 명문 대학으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리고 제2의 창학 정신인 ‘정직’을 우리 대학의 교시로
김희수총장이 일본도쿠시마대학을 방문, 건양대학교와의 자매대학협약식을 맺고 기념패를 들어보이고 있다.2011년은 건양대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01년 개교 10주년 때 나는 총장으로 처음 취임하여 패기에 찬 젊은이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10년이란 세월이 쏜 화살처럼 지나가 버리고 이제 나는 7대 총장으로 20주년을 준비하고 있으니 지난 세월이 꿈꾼 듯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총장에 취임하면서 나는 ‘결자해지’란 말을 꺼냈다. 이후 10년 동안 나는 학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왔고, 그 노력의 결실도 하나둘 나타나 이제 나는 결자해지의 약속은 지켜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학교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면 내려놓으려 했던 총장직을 이번에도 또 자의반 타의반으로 맡게 되었다. 기호지세(騎虎之勢)라고,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12월에는 고용노동부가 주관하는 ‘2010년도 일자리창출지원 유공자’ 시상식에서 최고상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동안 전국 대학 중 최상위권의 취업률을 지켜왔으며, 해외취업을 활성화하고 산학협력을 통한 취업 연계활동을 활발히 해 온 공로로 받게 된 것이다. 그동안 가르쳤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취업은 교육과 함께 나의 제일 큰 화두였다. 그래서 2003년 취업 전담 교수를 임용하여 취업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하고 교과목까지 개설했다. 2004년에는 전국 대학 최초로 취업 전용 건물인 ‘취업매직센터’를 건립하고 취업교육에 필요한 실습실과 기자재들을 들여왔다. 또 학과별로 취업 전담 교수를 위촉하여 학생들의 취업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했으며, 전국 최초로 취업지원관과 창업지원전담관을 채용한 바 있다. 재학생들에게는 방과후 비교과교육을
2010년 초 교과부에서 잘 가르치는 대학 10곳을 뽑아서 4년간 30억 원씩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우리 대학도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1월 말에 공고가 나왔다. 바로 TF팀을 구성해서 준비에 들어갔다. 교육중심대학은 우리 대학이 꾸준히 지향해 온 목표였기 때문에 반드시 도전해야 하는 과제였다. 대학의 학생 비율이 대학원생보다 학부생이 압도적으로 많은 데도 지난 10여 년간 정부 지원이 연구 쪽에 치우쳐 있어서, 우리 대학처럼 교육에 집중해 온 학교는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방대학의 경우 졸업생의 90% 이상이 사회로 진출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은 소수이기 때문에 취업을 위한 교육에 주력해 왔던 터였다. 사실 대학의 목적은 교육에 있으며 교수와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가르치고
2010년 1월 15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께서 주요 대학 총장 초청 오찬간담회를 여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 이장무 서울대 총장, 이기수 고려대 총장, 서정돈 성균관대 총장, 노동일 경북대 총장, 김인세 부산대 총장 등 전국 21개 대학 총장들과, 정정길 대통령 실장, 진동섭 교육과학문화수석,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등도 함께 한 자리였다. 이날 대통령께서는 청년 취업 문제, 등록금 문제, 입학사정관제 문제 등을 거론하셨고 정부의 대학 정책과 G20 정상회의 등에 대해 총장단의 의견을 구하셨다. 그리고 당시 국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던 등록금 상한제를 언급하면서 등록금은 대학 자율로 정해야 하지 법으로 결정할 문제라 아니라고 하면서, 지난해 대학에서 스스로 등록금을 동결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치하하셨다. 경기가 회복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