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대표이사 사장: 이영래 (유한화학) ◇부사장:김재훈 (유한크로락스) -재신임◇대표이사 : 박종현 (유한크로락스 / 공동)김상철 (유한메디카)강덕현 (와이즈메디)
유기합성에 의한 고혈압 치료제 캡토프릴의 개발 성공에 이은 항암제 BR-8702의 성공은 비단 보령제약의 영예뿐만이 아니라 국내 제약업계의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되었다. 그것은 국내 제약업계의 신약개발 가능성과 능력을 세계에 입증시켜준 뜻 깊은 성과였다. 1989년 말에서 1991년 중반까지 국내 신문들은 ‘보령제약에서 새로운 약물을 개발해 냈다’는 기사를 종종 실었다. 특히 경제지들은 신 물질 개발의 의미를 중요시 여기고, 그 개발의 산실인 보령 중앙연구소 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개발과정과 전망 등을 업계에 자세히 소개했다. 이 때 개발된 신 물질이란 다름 아닌 암 치료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암 치료제 개발은 보령제약 30년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성과 중의 하나였다. 보령제약의 암 치료제 개발 성공은 1989년 말, 해외특허를 받은 사실이 국내에 처음으로 알려졌던 신 물질 BR-8702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앙연구소는 1985년에 처음으로 물질특허를 외국에 출원했는데 이 때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 7개국으로부터 해외 특허를 취득하게 되었다. 물질특허를 받은 BR-8702는 항암 및 면역 조절 작용을 지닌 인(燐)계 포스포리피드와 항암 및 항바이러스 작용을
서양에 ‘작지만 아름답다’라는 미학적 격언이 있다. 곳곳에서 그룹 해체의 굉음이 들리고 있는 요즘, 모두가 나름대로의 영역에서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는 6개 계열사들의 보령그룹은 작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집단인가. 그동안 한국경제는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그룹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문어발식 경영’이라는 비난 속에서, 그들 재벌그룹들이 나름대로 경제 성장의 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의든 타의든 거대 그룹들은 계열 분리의 태풍 속에 있으며, 그 와중에 그동안의 무분별한 업종 확장과 몸집 불리기의 병폐가 얼마나 컸는지를 톡톡히 실감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사실 업종이 다른 각 사의 저력을 하나로 통합해 보다 큰 힘을 창출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책임관리체제의 확립과 급변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대응력을 갖추어야 한다. 보령제약 그룹 직원들의 활짝 웃는 모습. 기업은 이들 구성원들로 조직된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다. 일류기업이란 제품의 우수성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기업 활동이 자연스럽게
보령그룹의 새로운 출발은 제약기업으로서의 재도약을 활발히 추진하는 동시에 다양한 미래지향적 사업 분야에 도전하기 위한 포부였다. 제약기업 하나에만 의존하지 않고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다가오는 21세기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창사 후 처음으로 자매회사를 설립한 것은 1979년 4월이었다. 매출이 신장하고 조직의 기능이 효율적이었다는 판단 아래 나는 보령장업주식회사(保寧粧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대표이사에 취임, 처음으로 제약 이외의 업종에 발을 들여놓았다. 보령장업은 가정용품과 유아용품 등 이른바 의약부외품(醫藥部外品)을 사업대상으로 삼은 회사였다. 선진국의 관련 산업을 두루 돌아본 뒤 나는 장차 경제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가정 및 유아용품의 전망이 밝다고 판단, 1년여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신규회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설립과 함께 보령장업은 미국 드라케트사, 서독 마파사 등과 기술제휴 및 수입 판매계약을 체결하고, 특수 화장품 생산과 수입판매를 겸할 수 있는 기구와 체제를 정비한 후 1980년 7월부터 본격적인 판매활동에 들어갔다. 보령제약의 첫 제품은 드라케트사의 유리세척제 및 광택제, 마파사의 치의학적 젖꼭지 누크(
제약기업이 이윤 추구에만 급급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불량 의약품처럼 심각한 폐해를 낳기 마련이다. 반면에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려고 노력할 때 그 성과는 많은 이의 건강증진은 물론 생명보호라는 차원에까지 이르는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 봉사는 자기과시나 헌신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봉사란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 것일 때만이 가치가 있다. 따라서 어떠한 대가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봉사란 이미 봉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일 수밖에 없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도 따지고 보면 봉사에 따른 자만심을 경계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자신보다도 타인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삶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배금사상(拜金思想)과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세태 속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지고 인정이 메말랐다고 할지라도 척박한 땅을 풍요롭게 가꾸기 위해 오늘도 묵묵히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 분들의 존재야말로 이 사회를 지탱해 주는 뿌리요 기둥이요 우리 모든 이의 희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인류
인생의 손익계산서란 결코 수치상의 결산으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에 얼마만한 땀과 정열이 담겨 있느냐에 따라 가치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정도를 걷자. 한 목표를 정해 인생의 승부를 걸었다면 한 눈 팔지 말고 외길을 가는 삶이 진정한 가치다운 것이다. 1987년 8월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소위 선진국형 특허제도라 불리는 물질특허가 시행됨에 따라 국내 약업계를 포함한 정밀화학업계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제도의 실시는 결국 외국 제약업체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제약업 대외개방이 이루어질 경우 선진국의 첨단 과학에 의해 생산된 신물질이 상륙할 것이 분명했고, 지금까지 개량적인 연구에 의해 대부분의 의약품을 생산해왔던 국내 제약기업들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연구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고 이를 제약에 응용해야 했는데, 국내 업계의 경우 그에 따른 막대한 설비나 인력을 확보할 여력이나 기술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던 문제들이 국제 분쟁으로까지 번진 사건이 발생했다. 보령제약이 자체 연구에 의해 개발해낸 치료제에 대해 외국의 제약회사가 특허
지난 세월 동안 보령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공존공영의 정신이 밑거름되었음은 물론이다. 묵묵히 땀 흘려 일해 온 직원들의 노력과 의약계 모든 분들의 격려와 성원이 보령을 만든 힘이었음을 생각하면 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상을 받는 일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영역과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럴 경우 상은 자신의 맡은 바 책임과 의무에 더욱 큰 소명감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나 또한 지난 세월동안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 때마다 약업인이자 경영인으로서, 또 이 나라와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깨가 무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수상(受賞)이나 수훈(受勳)은 항상 그 정도밖에 못하느냐’는 채찍질이자 ‘보다 값진 일을 해내야 한다’는 숙제였다. 우선 가장 기억에 남는 상은 19983년 3월에 받았던 ‘약(藥)의 상’이었다. 약업신문사(藥業新聞社)가 주관하는 이 상은 매년 약업계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인사를 선정하여 수여하는 것으로서, 국내 약업계에서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또 확대하면서 나는 누구에게도 그 규모나 설비를 내놓고 자랑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 공간 안에서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연구원들만은 누구에게라도 내놓고 자랑하고 싶었다. 바로 그들이 우리 보령의 미래이자 참된 ‘청년 보령상(像)을 만들어가는 주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치료의약품생산에 전력을 기울이던 1982년 2월, 보령제약 중앙연구소의 설립은 우리에게는 새로운 꿈의 산실을 마련했다는 큰 의미를 가진다. 기술개발과 연구요원 양성이라는 목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연구소는 미래의 제약업을 이끌기 위한 우리의 원대한 포부가 축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했던 한국경제는 외국 제약회사의 원료부분 100% 투자개방이라는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연건평 1,200평 규모의 보령제약 중앙연구소. 당시로서는 업계에서 최신식 기기를 갖춘 가장 큰 규모의 연구소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국내 제약업계의 대비는 결코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정밀화학공업 분야의 확고한 기반 없이 양적인 팽창만 거듭해온 국내의약품산업은 기초 원료는 물론 합성기술 개발 부문에서도 넘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의약품 제조분
우리도 질적인 진정한 성장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그 방안으로 제시된 설계안이 신제품 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해마다 최소한 5개 품목 이상의 우수한 신제품을 개발하여 대메이커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제품을 보다 다양화시켜 급변하는 시장 경쟁 구도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한국경제는 GNP성장률 마이너스 5.7%라는 심각한 퇴보 속에서 80년대를 맞았다. 70년대의 고도성장에 제동을 건 이 상황은 그동안 양적인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질적 성장에 소홀했다는 자성(自省)을 추구하는 뼈아픈 교훈이기도 했다. 우리도 질적인 진정한 성장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고, 그 방안으로 제시된 설계안이 신제품 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해마다 최소한 5개 품목 이상의 우수한 신제품을 개발하여 대메이커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제품을 보다 다양화시켜 급변하는 시장 경쟁 구도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우리는 우선 병원 영업의 활성화를 통해 치료제 시장을 개척하고, 이를 기반으로 비처방약품에 의존하는 기존의 영업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국내에서 비처방약품인 OTC제품에 주력하다 보면 전체적으로 많은 수의 영업사원을 투입하고 관리해야
나는 급한 대로 용각산을 소중하게 위문품으로 포장하도록 해서 현지로 보내주었다. 열사(熱砂)의 중동에서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마시며 땀 흘리는 우리 근로자들에게 용각산이 작은 격려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미국에 인삼제품을 처녀 수출한 이래 겔포스, 앰피실린, 아목사실리 등의 수출을 꾸준히 실현시켜 온 보령은 외화 획득을 통해 국익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 매출액의 신장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인삼제품은 미국에 수출된 후 서독, 동남아시아, 남미 등으로 수출지역을 확장했는데 특히 말레시아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현지 합작투자협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겔포스 또한 자유중국에 수출된 이래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특히 수질오염이 악화되면서 위장질환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 겔포스에 대한 선호도는 더욱 높아졌다. 자유중국 내에서 겔포스의 탁월한 치료 효과가 알려지면서 일본과 싱가포르에서도 수출의뢰가 오고 있었다. 인삼제품과 겔포스의 수출은 1980년 한 해 동안에 약 50만달러 상당의 외화를 획득하였으며 1981년 상반기엔 약 37만달러, 연말에는 100만달러를 돌파했다. 한편 80년대 들어 보령제약에는 난데없이 중동 각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