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던 해 6ㆍ25전쟁이 일어나 전주구호병원에서 부상병과 피난민들을 치료하다가 대전구호병원으로 옮겨왔고, 휴전협정 후 대전보건소 초대 보건소장으로 근무했다. 보건소에 있을 때 결혼을 했고 첫딸이 태어난 후 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1956년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사랑하는 가족과 몇 년간 헤어지는 고통이 있었지만, 선진 의학과 더 큰 세상을 보고 배울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1959년 3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인천 기독병원에 잠시 근무했으나 1961년 5ㆍ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약 1년간의 민주당 정권의 혼란상을 보다 못한 군부가 새롭게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비역 군의관 소집령이 발포되었다. 나는 6·25전쟁 때 전주와 대전의 구호병원에서 근무했으며, 1954
건양대병원은 2010년에 개원 10주년을 맞았다. 병원의 역사가 짧은 만큼 우리 병원에는 최첨단 의료 장비들이 많다. 의료 장비는 워낙 고가이다 보니 한번 구입하면 새 기기 도입이 어려워, 신설 병원일수록 최신 장비가 많은 셈이다. 개원 초기에 MRI(자기공명단층촬영기)를 비롯하여 16 Slice CT(최첨단 컴퓨터단층촬영기), ANGIO(혈관조영촬영기), 감마카메라, 종양 치료에 사용되는 LINAC(선형가속기), 담낭이나 담석이 있을 때 수술하지 않고 고에너지 충격파를 이용하는 ESWL(초음파쇄석기), 인체를 3D 입체 영상으로 보여주는 라피티아 등 대학병원에 걸맞은 각종 최신 장비들을 확보했다. MDCT(다면검색 컴퓨터 단층촬영기), CYCLOTRON(원형입자가속기), FULL PACS (영상획득 및 전송시스템), OCS(의료정보종합시스템) 등 최상의 진료 설비와 서비스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지역 의료 수준을
2002년 우리나라는 월드컵 경기를 통해 온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놀라운 기적을 일구어냈던 해이다. 온 국민의 열망으로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 민족 전체가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치고 감격에 겨워 태극기를 흔들었다. 더구나 전 세계가 우리를 향해 관심을 쏟았던 경사스러운 행사에 우리 건양대병원이 일조하게 되어 지금도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2001년 3월 우리 병원은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선정하는 2002년 FIFA 월드컵 축구대회 공식 지정병원에 대전ㆍ충남에서 유일하게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대전의 유수한 병원 가운데 가장 후발주자이고 개원한 지 불과 1년 밖에 안 된 상황에서 공신력 있는 대외기관으로부터 우수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월드컵 지정병원은 각국 선수단과 FIFA 임직원, 대회 관계자,
개원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료계는 의약분업 파동으로 대대적인 파업에 돌입하였다. 당초 일찍 해결되리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장기간 계속되면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사회적 비난도 쏟아졌다. 비교적 고소득층인 의사들이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환자들을 인질로 삼아서야 되느냐는 비난도 쏟아졌다. 계속 운영되어오던 병원들이야 어떻게 꾸려간다 하더라도 이제 막 개원하여 환자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문을 닫게 되면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의사협회와 병원협회 등의 강경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다가는 앞으로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리 병원도 어쩔 수 없이 파업에 동조한다는 뜻을 밝혔다. 단 파업 참여는 의사들의 자의에 맡긴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조마조마했다. 의사들 역
오늘날은 병원이 단순히 진료만 하는 시대가 아니다. 병원 건물을 크게 짓고 최신식 의료장비를 도입해 놓고 환자를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라 환자들이 병원과 병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자신에게 적합한 병원을 찾아나서는 시대가 되었다. 병원을 지을 때부터 나는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병원, 문턱이 낮은 찾기 쉬운 병원, 환자 중심의 환경을 갖춘 병원, 내 집처럼 편안한 병원을 목표로 삼았다. 이것은 우리 건양학원의 건학 이념이기도 하고, 내가 40년 동안 김안과병원을 운영하면서 늘 강조해 온 말이기도 하다.개원한 지 1년 만에 각종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의사, 간호사 및 많은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교수가 365일 직접 진료하는 병원’을 모토로 내걸고 수준 높고 신뢰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공표한 만큼 교수님들은
병원이 준공된 후 이제부터는 개원 시점을 언제로 하느냐가 문제였다. 2000년은 새로운 21세기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개원을 앞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새로운 세기와 함께 뻗어나갈 수 있는 최적의 시점이었다. 모든 매스컴이 뉴밀레니엄의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호들갑스러울 정도였다. 나도 생각 같아서는 2000년 1월 1일, 새천년 즉, 뉴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우리 병원을 개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병원 건물 준공이라는 큰 골격이 완성되었으니, 거기에 살을 붙이고 세세한 실핏줄까지 이어지도록 하여 하나의 살아 있는 거대한 공동체처럼 내부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해야 했다. 일단 병원 진료개시 시점을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로 잡아놓고, 의료 장비 및 기본 물품들을 설치하고, 유능한 의료진과 직원을 선발하기로 했다. 12
부지 선정에서부터 설계, 시공회사 선정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비를 넘기고 막상 병원 신축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자, 2000학년도 신학기 전에 개원을 서둘러야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병원을 개원해야지만 2001년 제1회 졸업생 배출을 앞두고 교수 초빙에서 학생 실습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차질 없이 이루어질 터였다. 개원 전 3~6개월의 시험운영기간을 감안해서 1999년 10월말까지는 공사가 어떻게든 완료되어야만 했다. 병원 설계를 1997년 5월에 끝마쳤으니 최대한 공사 기간을 짧게 잡아야 했다. 그래서 건축 허가 기간 동안에 시공회사를 선정하는 등 처음부터 시간에 쫓기며 공사를 추진해야 했다. 건축 공기를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서는 계약 동시에 본 공사가 진행할 수 있도록 공사장 진입로 개설, 지하수 개발, 수목 제거 등 기초적인 작업을 사전에 마쳐
나는 설계에 앞서 해외 병원을 두루 시찰했다.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좋은 병원을 짓고 싶었다. 1996년 1월 도쿄의대, 이바라기현 중앙병원, 지께아기 의대병원, 국립암센타, 성루가병원 등을 방문하여 세밀히 살펴보았고 그들의 외래 접수처 및 배치 상황을 설계에 많이 반영시켰다. 2차로 6월에 오사카 시립대학병원을 돌아봤는데 일본에서 가장 현대적이라는 병원답게 규모와 설비가 매우 컸다. 약 1,800병상으로 우리 대학의 600병상하고는 차이가 많아 별 참고가 되지 않았다.해외 병원 견학 외에 국내 병원 중에서는 우리 대학 규모의 노원 을지병원, 전북대학병원, 충남대학병원, 분당 차병원, 이대 목동병원, 아주대학병원 등을 돌아보고 부분적으로 설계에 반영시켰다. 1996년 11월에는 세계의료장비전시회가 도쿄에서 열려 참가했는데 새로운 MRI, CT기계를 비롯, 멸균기ㆍ
나는 의과대학 인가와 함께 오래 전부터 구상해 오던 대학병원 건립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안과를 전문으로 하는 단일 병원을 30여 년간 운영해오면서 동양 최대의 안과병원이라는 명성까지 얻었던 나로서는 이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종합병원 건립의 꿈을 안고 병원 부지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대학이 위치해 있고 나의 고향이기도 한 논산에 병원을 건립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발전을 위하여 보람 있는 일을 하겠다는 신념에서 육영사업을 시작한 만큼, 여기에 연관된 의료사업도 당연히 고향을 위해 바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동안 의료 혜택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고향 사람들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터였다.나는 건축학과에 재직중이셨던 안병익 교수를 비롯하여 경영학과 교수 몇
인생의 대부분을 오로지 의사로서 살아온 내가 뒤늦게 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의과대학까지 세운다는 것은 내 육영사업에 있어서 대단원을 이룬 것과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병원을 운영하면서 의료와는 궤도를 달리하는 육영에 몰두해왔던 내가 비로소 평생 쌓아온 의료 지식과 병원 운영의 경험을 교육에 접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1994년 9월 교육부로부터 숙원사업이었던 의학과와 간호학과의 인가를 받았다. 그 해 초에 의과대학 설립 신청을 해서 9월에 50명의 정원으로 인가를 받은 것인데 나로서는 평생 소원하던 바를 이룬 셈이다. 의과대학은 대부분의 대학들이 십수 년씩 걸려 설립 허가를 받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 대학은 단 한번에 그 절차를 마친 것이다. 당시 내가 청와대와 어떤 연결선이 있어서 쉽게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