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사를 편찬하자 종중에서는 종훈(宗訓)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속출했다. 국가엔 국시(國是)가, 가정에는 가훈이 있는 법인데 항차 명문 광산김씨에 종훈이 없다는 건 말이 아니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여기서 의견을 도출, 숙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숭조정신 바로 살려 일가화합 이룩한다.(崇祖敦睦) 둘째 충효사상 바로 익혀 정의사회 구현한다.(家傳忠孝) 셋째 우리예법 바로 알아 덕으로써 실천한다.(禮本德行)이렇게 종훈을 만들고 나니 일가간의 화합에 더욱 확실한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며 이 같은 조상들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생활화하고 이를 정의사회 실현에 적용, 덕으로 세상 사람과 친목한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1990년 정기총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후로 대종회, 이사회 각종 행사 때는 꼭
나는 대종회 회장을 맡기 전에 재무이사, 부회장, 수석부회장을 5년간 맡았는데 회장이 되자 재임중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인화(人和)와 조직 확대에 역점을 두었다. 첫째, 인화를 강조했다. 어느 단체를 막론하고 인화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 특히 종친회란 일가를 구속할 수 있는 힘이 없으므로 모임에 안 나와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인화가 안 되면 조상 숭배나 예본덕행 모든 것이 공염불이다.김희수총장이 예복을 입고 대종회에 참석하고 있다.회장 재임 동안 각 시·도·군 종친회 총회에 가능하면 꼭 참석하여 일가 화합과 훌륭한 조상의 업적을 후손에게 길이 계승시키고 삼한갑족의 혼을 후세에 길이 보존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각 지방 종친회를 방문했을 때 지역마다 느낀 소감은 달랐지만, 일가화합과 조상의 훌륭한 유업을 잘 보존, 후
음력 10월 1일은 광산김씨 시조공 흥(興)자 광(光)자 님의 단소를 모신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서 전국 각지에서 오는 종친 5천~1만 명이 모이는 제삿날이다. 시조공의 제물은 모두가 생식이다. 조·쌀이며 밤도 깎지 않고 돼지도 삶지 않은 생고기를 올리는데 헌관·축관·집례는 5대파에서 선출된 초헌·아헌·종헌관에 의해 삼헌관의 집례로 거행된다. 오전 11시에 단향이 봉행되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단풍놀이를 겸해 단소 참배를 갖는 종친들이 타고 온 많은 관광버스를 볼 수 있다. 단소의 취사장은 고인이 되신 용순 고문의 주선으로 대우 김우중 회장이 거금을 희사해 주어 옛 건물을 헐고 새로 건립했다. 초라해 보인다는 단소를 보수 확장하고 나니 종친들이 제례를 올릴 때 떳떳하고 긍지까지 갖는 듯했다. 또 단소를 매년 주차장이 있는 면 소재지에서 평장동
나는 대종회 수석 부회장으로 재임 시 용순(容順) 회장과 광산김씨 대종회 회관을 건립하기로 결심, 모금을 시작했는데 마침 여의도 백화점 사장으로 계시는 김희수(金熙洙) 종친이 시가 약 1억원의 땅을 선뜻 내놓아 순조롭게 풀렸다. 그러나 그 부지는 너무 주택지와 가까워 회관 위치로는 적합지 않다 해서 이를 매각, 현 위치인 마포 용강동에 땅을 구입했다. 이에 힘입어 전국 종친에게 종보를 통해 회관 건립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많게는 몇백만 원에서 적게는 몇천 원씩의 성금이 답지했다.회관이 없어 모두들 아쉬워하던 차에 이를 세우고 나니 종친들이 수시로 찾아와 문중 일을 논의도 하고 족보를 열람, 무슨 파 몇 대 손인가를 확인하며 차라도 한잔씩 나누고 돌아가게 되어 자연스레 모임의 중심처가 되었다.김희수 총장이 정부로부터 무궁환훈장을 받고
의료사업과 인재 육성에 힘쓰면서 나는 종친회의 일에도 열과 성을 기울였다. 1985년부터 9년 동안 광산 김씨 19~22대 대종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처음 대종회장직을 맡아 관장하자, 주변에서는 병원 일도 짐이 무거울 텐데 종친회 일까지 매달려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부터 이미 보학에 대해 많은 것을 들어왔고 일가끼리 서로 돕고 아끼는 일은 생활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종친회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20세기 최고의 석학 토인비도 한국의 대가족제도와 효 사상을 높이 평가하여 한국 방문을 희망하였으며, 노후에 외롭다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끝내 아들집으로 합류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가족이나 혈통에 대한 애착은 인간의 본능이요, 자연스러
나는 광산 김씨 문안공파 38세손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의 법도 아래 자라났으며 보학(譜學)의 중요성을 누누이 들어왔다. 이러한 환경은 나의 심중에까지 깊이 뿌리 내려 광산 김씨의 자손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고, 광산 김씨 일가를 위한 일이라면 내 모든 여력을 다하여 힘써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가 金氏이고, 김씨는 모두 280여개의 본관이 있을 정도로 번창하다. 그 중에서도 광산 김씨 일가는 김씨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의 하나이다. 우리 광산 김씨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및 신라, 고려, 조선의 삼조(三朝)를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 대대로 최고의 가문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담긴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 전 시대에 걸쳐 학문이나 관위(官位)에서 두드러진 조상을 둔 집안이 아니
나의 아내는 스물세 살에 스물일곱 살인 나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낳아 기르며 자상한 어머니로, 성실한 내조자로서 현모양처의 역할을 다해 왔다. 이만큼 가정을 꾸려오고 병원과 대학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과 부지런함 때문이었다.1954년 결혼할 때 나는 대전보건소에서 근무하였고, 전후 잿더미 위에서 모든 것이 다 부족하고 궁핍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가장 어려웠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결혼한 지 일 년 후에 장녀 용애를 출산하였고 첫딸에 대한 사랑과 처에 대한 정은 더욱 더 깊어져 갔다. 결혼 생활 3년여 되는 해 나는 가족의 생활 대책도 세워놓지 못한 채 도미(渡美) 유학길에 올랐다. 여유가 없는 생활이다 보니 가족이 걱정되면서도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경상학관 앞에서 부인 김영이여
요즘 어느 가정에 가나 크고 작은 가훈이 문패처럼 걸려 있다. 한때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운동을 벌였던 여파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어 혈통과 사회 규범, 가정 내의 생활 규범과 가족의 화평 등을 강조해 왔다. 가훈은 한 가족이 지켜야 할 근본적인 도리와 삶의 철학을 나름대로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가훈이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선진 서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 주변에선 우리 집 가훈이 어떤 것인가 궁금해 하는 이가 많다. 가장인 내가 나름대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기에 거창한 가훈을 내걸고 있는 줄로 착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선조께서 거유(巨儒)이기 때문에 공맹(孔孟)의 어록(語錄) 같은 걸 인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김총장의 장모가 세운 대전 보문산에 있는 고촉사
나는 시카고의 일리노이 대학원을 마치고 시카고 안과병원에서 수학하다 1959년 9월, 3년 3개월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막상 귀국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처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딸 용애는 얼마나 컸을까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시바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돌아오는 여정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오레곤 주를 거쳐 북동부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다시 한미재단이 알선해 준 배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3년 전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딜 때는 서해안 남단의 롱비치 항이었는데 돌아갈 때는 북단의 시애틀 항에서 떠나는 것이 감회가 새로웠다. 한국행 미군 수송선에 타보니 미국에 올 때는 장교 전용 일등실이었는데 이번엔 배 밑바닥에 있는 사병 침대에서 식사도 화장실도 사병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근무에 열중하다 1년이 거의 되었을 무렵 하루는 의무부장이 불러 가 보았더니 6개월 코스의 일리노이대학 안과대학원에 갈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선뜻 가고 싶다고 대답했고, 의무부장의 추천으로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 안과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시카고는 뉴욕에서 2시간 거리로 미시간호에 연해 있으면서 시내에 잘 발달된 수로가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는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다. 물론 수업료, 숙식비, 월급 등 제경비를 병원에서 대주어 별다른 불편 없이 대학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하루종일 수업과 실습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복습과 야근을 하고 나면 몸이 몹시 피곤했다. 미국 유학중 김총장은휴가철엔 미국의 유명한 곳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나섰다.그러나 나는 공부의 연장도 될겸 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