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뉴욕 맨해탄의 ‘그랜드 스테이션’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맨해탄의 거리는 듣던 대로 온통 하늘을 치솟을 듯 솟아 있는 빌딩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나는 사람들도 흑인들이 많았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든 채 노란 택시를 타고 뉴욕 업타운에 위치한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 안내데스크에서 안내해준 대로 인턴 숙소에 짐을 풀고 즉시 옷을 갈아입고 나의 근무지인 일반외과로 갔다. 7월 1일이 인턴 근무 시작인데 7월 10일에 도착하였으니 10일이나 늦은 상태였다. 우리 한국사람들 같으면 먼 곳에서 왔으니 좀 쉬고 다음날부터 근무하라는 배려가 있을 법한데 미국 사람에게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뉴욕에서의 인턴시절.바로 그때 구내 방송이 나오는데 직감적으로 나를 찾는 방송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바로 도착했기에
당시 대전보건소는 미국 정부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식 예방의학 제도를 도입하여 예방주사, 모자보건, 전염병 예방 및 치료를 주로 실행하였다. 나는 대전보건소의 첫 소장으로 근무하던 중 마침 미국 병원에 인턴 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잘 발달된 선진 의학을 배워올 수 있다는 벅찬 기대에 정성스럽게 서류를 갖추어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마음을 졸이며 그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마침내 뉴욕에 있는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당시는 해외유학을 가려면 정부에서 시행하는 해외유학 자격시험을 보아야 했는데 나는 도미 유학의 꿈을 안고 친구들 몇 명과 저녁이면 토니 박사라는 선교사로부터 영어 교습을 받아왔기 때문에 외무부에서 유학생들을 상대로 치르는 영어시험에 쉽게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김희수총
9ㆍ28 수복 이후 국군이 평양을 거쳐 압록강가에 이르는 등 전세가 반전되면서 사회는 폐허 속에서나마 나름대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나는 전주에서 1년을 근무한 뒤 1952년 10월 대전구호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전국에 15개의 보건소와 수백 개의 보건진료소가 설치됐다. 미군정 하에서 처음 세운 서울시립보건소가 전쟁 중 파괴되는 등 의료시설이 부족해지자 전쟁 후 유엔의 지원으로 구호와 보건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 보건소, 보건진료소를 설치한 것이다. 이 때 대전구호병원은 대전시보건소가 됐고 1953년 나는 대전시보건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해 지역 주민의 건강관리를 책임졌다. 대전시보건소는 대전시 은행동에 있었는데 유엔 지원 하에 미국식 예방의학제도를 도입해 예방접종, 모자보건, 전염병 예방 및 치료를 주사업
6ㆍ25전쟁의 비극은 우리 동포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고 뼈저린 한(恨)을 남겨주었다. 우리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째 형님이 딸 하나를 제외한 전 가족과 함께 폭격으로 참변을 당했다. 나의 바로 위 누님 한 분도 오빠인 용산의 작은 형님댁에 다니러 왔다가 같은 참변을 당했다. 훗날에 들은 이야기지만,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사변이 일어나 38선이 무너지고 3~4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는데 아군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연일 남쪽으로 밀리는 형국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전세 속에서 7월 초순경 미군(당시는 유엔군)의 B-29 폭격기가 연일 용산 일대에 많은 폭탄을 투하하여 형님댁이 폭격을 맞았다는 것이었다.김희수 총장이 받은 의사면허증.당시 용산에 한국은행 조폐공장인 정금사가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지폐 조판기를 북한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세브란스 의대는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의학교육 전문기관으로 1884년 궁정 어의(宮廷御醫)로 봉사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H. N. 알렌 박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1885년 4월 10일 고종황제가 알렌 박사에게 구리개(銅峴: 현재 을지로 입구)에 제중원(濟衆院: 초기 이름은 廣惠院)이라는 병원을 설립하게 한 것이 바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이다. 1886년 3월 29일 학생 16명(16명의 학생 중 12명만이 본과로 진출되어 졸업후 외국에 파견되는 사절단이나 군함의 의사로 활약하였다)을 선발하여 개학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곧 연세대학교 역사의 시작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 강습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 후 제중원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 의과대학 교수였던 O.R. 애비슨 박사가 인계 받아 미국 클리블랜드시의 L. H. 세브란스씨로부터 기증 받았던 기금으로 1904년
해방이 되던 1945년 나는 중학 졸업반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새 정부수립까지 남북회담·좌우익 싸움·신탁통치 찬반 등을 외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어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당시 사회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격동기였는데 하루는 누군가가 “해방이야. 일본이 손을 들었어!” 하고 외쳐대자 학교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직원실을 지나다 힐금 넘겨다보니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선생들이 좌불안석으로 ‘칙쇼!’를 외치며 얼굴엔 살기가 등등했다. 살아 있는 신이라던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뉴스가 나온 직후였다. 그날 오후 징과 꽹과리를 앞세운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가 하면 경찰서와 군청, 일인 상점을 찾아다니며 시위를 벌였다. 그것은 환희와 감격의 표출
나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무엇이 되겠다거나 친구들을 향해 이래라 저래라 큰소리쳐 본 일이 거의 없었으며, 대대장이나 중대장을 지내본 일도 또 그것을 바란 일도 없었다. 오직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나는 늘 부모님이 고맙고 전통 있는 중학교를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자적(自適)했던 것 같다. 그저 공부가 걱정되어 남한테 뒤질세라 교과서에 매달렸고 남들이 잠든 사이 이불 속에서 전지 불을 켜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남이 세운 수석(성적)을 깼다거나 천재 소리는 들어본 일은 거의 없었지만 암울했던 그 시절에 나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패기 있는 동창들 중에는 당시 나를 소심한 친구니 ‘공부벌레’라 치부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공주중학 졸업 기념사진중학교 시절 잊지 못할 선생
시대가 아무리 험난하고 절망적이라 하지만 푸릇푸릇한 젊음을 지닌 청년들에게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낭만과 포부가 있기 마련이다. 당시의 기숙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규율이 엄격하여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즐거움도 있었다. 하급생들은 아침 5시에 기상나팔이 울리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학교 운동장에 나가 점호와 아침체조를 한 다음 상급생의 시중들기에 바빴다. 침구 정리, 방안 청소를 시작으로 실장의 세숫물 준비, 책가방 챙기기 등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아침식사 시간이 되었다. 공주중학교 기숙사 전경.식사 나팔소리와 동시에 재빨리 식당으로 뛰어가는데 그 이유는 배가 고파서이기도 하지만 늦은 학생은 끝번서부터 몇 명을 잘라 오후 수업이 끝난 뒤 기숙사에 돌아와서 변소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기숙사의 식당은 급식
공주중학교에 입학을 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바로 이듬해인 1942년이었다. 일제시대 중학교는 오늘날 중·고등학교의 통합과정으로 운영되었다. 그때는 군청 소재지에 중학교가 없는 곳이 많아 중학교만 가도 유학으로 생각할 때였다. 그러니 당시 일류로 알려져 있던 대전중·공주중·강경상업·공주사범 등에 붙으면 온 동네가 경사 났다고 떠들썩했다. 금단추 뻔쩍이는 검은 교복과 교모를 쓰고 고향에 가면 이웃 사람들이 몰려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바람에 우쭐해 하던 시절이었다.공주중학교 교사는 시내 상단에 위치하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래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산성공원과 시내 중심부를 흐르는 제민천과 어울려 잘 짜여진 도시 형태는 지난날 충남의 도청 소재지였음을 일깨워 주었다. 공주는 거기에다 공주중학교·공주농전·공주여자사
내가 양촌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여덟 살이 되던 1936년이었다. 막내로 집에서 응석이나 부리던 내가 아버님의 손을 잡고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자주 붉히곤 하던 기억이 어제 일인 듯하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행랑채 아주머니가 번갈아 등·하교 길을 같이해 주셨기 때문에 낯설음을 금세 극복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 무렵 형수님이 나를 도련님이라 불러 그 호칭이 귀에 익었으나 행랑채 아주머니까지 도련님이라 부르는 게 이상했다. 한번은 어머니께 “왜 행랑채 아주머니까지 그리 부르냐” 여쭈었더니 “장차 너는 크게 될 사람이라 그런다”며 웃어 넘기셨다. 그 아주머니는 내가 공주 이인(利仁) 형님댁으로 옮길 때까지 유모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