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에서 살다보면 동포만 만나도 예사롭지 않은데 일가를 대할 때는 더욱 반갑기 마련이다. 그래서 도쿄ㆍ오사카ㆍ뉴욕ㆍ샌프란시스코 등 일본과 미주는 물론 중국 연변ㆍ구라파 종친회까지 결성했다. 김씨라 해도 김녕김씨ㆍ김해김씨ㆍ경주김씨 등 다양한 계보가 있어 광산 일가를 서로 알아보고 친목을 다지는 계기가 되자 모두들 환영을 했다.미국 뉴욕 종친회1970~1980년대에 우리 동포들이 해외로 이민을 가 해외에도 우리 광산김씨가 많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국 뉴욕에 종친회를 결성키로 하고 그 준비를 뉴욕대학 김영근 교수에게 부탁하였다. 1986년 마침 제주 출신 사업가로 승조정신이 투철한 동빈 대부를 회장으로 모시고 오늘까지도 뉴욕종친회는 잘 운영되고 있다.동빈 회장은 대종회 대소행사에도 꼭 참석해주시고 내가 회장 재임 중에도 대종회를
나는 대종회 회장을 맡기 전에 재무이사, 부회장, 수석부회장을 5년간 맡았는데 회장이 되자 재임중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인화(人和)와 조직 확대에 역점을 두었다. 첫째, 인화를 강조했다. 어느 단체를 막론하고 인화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 특히 종친회란 일가를 구속할 수 있는 힘이 없으므로 모임에 안 나와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인화가 안 되면 조상 숭배나 예본덕행 모든 것이 공염불이다.김희수총장이 예복을 입고 대종회에 참석하고 있다.회장 재임 동안 각 시·도·군 종친회 총회에 가능하면 꼭 참석하여 일가 화합과 훌륭한 조상의 업적을 후손에게 길이 계승시키고 삼한갑족의 혼을 후세에 길이 보존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각 지방 종친회를 방문했을 때 지역마다 느낀 소감은 달랐지만, 일가화합과 조상의 훌륭한 유업을 잘 보존, 후
음력 10월 1일은 광산김씨 시조공 흥(興)자 광(光)자 님의 단소를 모신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서 전국 각지에서 오는 종친 5천~1만 명이 모이는 제삿날이다. 시조공의 제물은 모두가 생식이다. 조·쌀이며 밤도 깎지 않고 돼지도 삶지 않은 생고기를 올리는데 헌관·축관·집례는 5대파에서 선출된 초헌·아헌·종헌관에 의해 삼헌관의 집례로 거행된다. 오전 11시에 단향이 봉행되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단풍놀이를 겸해 단소 참배를 갖는 종친들이 타고 온 많은 관광버스를 볼 수 있다. 단소의 취사장은 고인이 되신 용순 고문의 주선으로 대우 김우중 회장이 거금을 희사해 주어 옛 건물을 헐고 새로 건립했다. 초라해 보인다는 단소를 보수 확장하고 나니 종친들이 제례를 올릴 때 떳떳하고 긍지까지 갖는 듯했다. 또 단소를 매년 주차장이 있는 면 소재지에서 평장동
나는 대종회 수석 부회장으로 재임 시 용순(容順) 회장과 광산김씨 대종회 회관을 건립하기로 결심, 모금을 시작했는데 마침 여의도 백화점 사장으로 계시는 김희수(金熙洙) 종친이 시가 약 1억원의 땅을 선뜻 내놓아 순조롭게 풀렸다. 그러나 그 부지는 너무 주택지와 가까워 회관 위치로는 적합지 않다 해서 이를 매각, 현 위치인 마포 용강동에 땅을 구입했다. 이에 힘입어 전국 종친에게 종보를 통해 회관 건립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많게는 몇백만 원에서 적게는 몇천 원씩의 성금이 답지했다.회관이 없어 모두들 아쉬워하던 차에 이를 세우고 나니 종친들이 수시로 찾아와 문중 일을 논의도 하고 족보를 열람, 무슨 파 몇 대 손인가를 확인하며 차라도 한잔씩 나누고 돌아가게 되어 자연스레 모임의 중심처가 되었다.김희수 총장이 정부로부터 무궁환훈장을 받고
의료사업과 인재 육성에 힘쓰면서 나는 종친회의 일에도 열과 성을 기울였다. 1985년부터 9년 동안 광산 김씨 19~22대 대종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처음 대종회장직을 맡아 관장하자, 주변에서는 병원 일도 짐이 무거울 텐데 종친회 일까지 매달려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부터 이미 보학에 대해 많은 것을 들어왔고 일가끼리 서로 돕고 아끼는 일은 생활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종친회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20세기 최고의 석학 토인비도 한국의 대가족제도와 효 사상을 높이 평가하여 한국 방문을 희망하였으며, 노후에 외롭다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끝내 아들집으로 합류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가족이나 혈통에 대한 애착은 인간의 본능이요, 자연스러
나는 광산 김씨 문안공파 38세손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의 법도 아래 자라났으며 보학(譜學)의 중요성을 누누이 들어왔다. 이러한 환경은 나의 심중에까지 깊이 뿌리 내려 광산 김씨의 자손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고, 광산 김씨 일가를 위한 일이라면 내 모든 여력을 다하여 힘써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가 金氏이고, 김씨는 모두 280여개의 본관이 있을 정도로 번창하다. 그 중에서도 광산 김씨 일가는 김씨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의 하나이다. 우리 광산 김씨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및 신라, 고려, 조선의 삼조(三朝)를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 대대로 최고의 가문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담긴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 전 시대에 걸쳐 학문이나 관위(官位)에서 두드러진 조상을 둔 집안이 아니
'9988'이라는 말이 대유행이다. "99세까지 젊은이들 못지않게 팔팔하게 살자"는 의미로 최근 노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말이다. 99세까지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파서 몸도 가누지 못하면 자식들이나 사회에 폐가 될 뿐이기 때문에 늙어서까지도 ‘건강하게 살자’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80세 정도라고 하는데, 오래 산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산 기간을 뜻하는 건강수명은 68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의학기술이 발달하고 위생 환경이 향상되면서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기간은 늘어났지만, 정작 질병을 앓으며 유병장수하고 있는 노인이 많은 것이다.김희수총장이 대학내에 있는 골프연습장에서 골프연습을 하고 있다.나는 여든을 넘겼지만, 아직 시력이 1.2이고 치아도 의치 하나 없이 건강하다. 피부도 주름이 적어 보톡스를 맞은
큰딸 용애(容愛)는 내가 도미할 때 세 살배기로 한참 애교 부릴 때였는데 몇 년을 떨어져 살아 아버지로서 애정을 다 쏟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용애를 인천 항에 떼어놓고 배에 오르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어릴 때부터 맏딸답게 얌전하고 어른스러웠다. 공부도 잘했고 부모 말에 순종적이어서 전형적인 모범생이라 할 수 있다. 진명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했으며, 서울의대를 나온 고건성(高健成) 군과 결혼을 했다. 벌써 50세에 이른 1남2녀를 둔 어머니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사위는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의대 이비인후과 수련을 거쳐 한림대 교수를 지낸 후 고이비인후과를 개업중이다. 영등포 나의 병원 근처에 병원을 신축했다. 자녀들이 어릴 때 김총장 부부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둘째딸 용란(容蘭)은 이화여고를 졸업, 연
나의 아내는 스물세 살에 스물일곱 살인 나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낳아 기르며 자상한 어머니로, 성실한 내조자로서 현모양처의 역할을 다해 왔다. 이만큼 가정을 꾸려오고 병원과 대학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과 부지런함 때문이었다.1954년 결혼할 때 나는 대전보건소에서 근무하였고, 전후 잿더미 위에서 모든 것이 다 부족하고 궁핍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가장 어려웠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결혼한 지 일 년 후에 장녀 용애를 출산하였고 첫딸에 대한 사랑과 처에 대한 정은 더욱 더 깊어져 갔다. 결혼 생활 3년여 되는 해 나는 가족의 생활 대책도 세워놓지 못한 채 도미(渡美) 유학길에 올랐다. 여유가 없는 생활이다 보니 가족이 걱정되면서도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경상학관 앞에서 부인 김영이여
요즘 어느 가정에 가나 크고 작은 가훈이 문패처럼 걸려 있다. 한때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운동을 벌였던 여파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어 혈통과 사회 규범, 가정 내의 생활 규범과 가족의 화평 등을 강조해 왔다. 가훈은 한 가족이 지켜야 할 근본적인 도리와 삶의 철학을 나름대로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가훈이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선진 서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 주변에선 우리 집 가훈이 어떤 것인가 궁금해 하는 이가 많다. 가장인 내가 나름대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기에 거창한 가훈을 내걸고 있는 줄로 착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선조께서 거유(巨儒)이기 때문에 공맹(孔孟)의 어록(語錄) 같은 걸 인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김총장의 장모가 세운 대전 보문산에 있는 고촉사